선순환을 이루기 위해 나의 마음의 방향은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자, 사진출처: 셔터스톡
마음의 방향.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같을지 몰라도 마음의 방향이 어디를 향하느냐에 따라, 좋은 향이 될 수도 있고 지독한 냄새가 될 수 있다. 사람에게 풍기는 향 혹은 냄새다. 뭐, 둘 다 같은 의미이기는 하지만 대조적인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굳이, 향과 냄새로 구분했다. 도대체 어떤 방향이기에 이렇게 극단적으로 갈릴까? 어! 우연일까? 좋은 향이 나는 것을 통틀어 ‘방향제(芳香劑)’라고 부르는 데, 방향(方向)과 동음인 것이 묘한 느낌을 준다.
안으로 향했느냐? 밖으로 향했느냐?
안으로 향했다는 말은 나에게 중심을 둔 방향이고, 밖으로 향했다는 말은 타인에게 중심을 둔 방향이다. 여기서 약간 헷갈릴 수 있는 부분이 있다. 타인에게 중심을 둔다는 말이, 타인을 의식하는 것을 말하진 않는다는 사실이다. 타인을 의식한다는 건, 나를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생각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오히려 자기중심이라 말할 수 있다.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해야 할 것을 하는 게, 진정한 타인 중심이라 말할 수 있다.
쓰레기를 줍는다고 하자.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하는 사람과 다른 사람의 눈에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에 하는 사람이 있다. 이 두 사람의 겉모습은 같을 수 있다. 크게 드러나는 부분은 같아 보인다. 하지만 만약, VJ가 몰래 붙어서 촬영을 하면 어떨까? 몰래카메라처럼 말이다. 그 사람이 마음에 품고 있는 향이든 냄새든 그것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지 않을까?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서는 같은 모습일지라도,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분명 다른 모습이 보이게 된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전자의 사람은, 숨겨진 쓰레기도 끄집어내서 주워 담을 거다. 왜? 그 사람은 쓰레기를 주워서 깨끗한 환경을 만드는 게 목적이기 때문이다. 후자의 사람은, 봤더라도 모른 척하고 지나갈 거다. 그 사람의 목적은 쓰레기를 줍는 게 아니라, 쓰레기를 줍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굳이 보이지 않는 쓰레기를 끄집어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왜? 다른 사람들한테도 보이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전자의 사람은 타인 중심이고, 후자의 사람은 자기중심이라 말할 수 있다.
나의 선행이 묻혀갈 때는, 아쉬운 마음이 든다. 알아달라고 하는 건 아니지만, 알아줬으면 하고 바라는 게 사람 마음이다. 안 그런가? 그냥 좋은 마음으로 했는데, 아무도 안 알아주면 서운한 마음이 든다. 좋은 마음으로 회의실을 깔끔하게 정리했다고 하자. 회의에 들어온 사람 그 누구도, 깨끗해진 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면 어떤가? 처음에는 순순한 마음으로 했지만, 조금씩 서운한 마음이 차오른다. 그런 마음을 얼마나 내려놓느냐가 마음 그릇의 크기겠지만 말이다.
내가 한 선행은 잊히지 않는다. 차곡차곡 쌓여, 다른 누군가가 갚아 준다. 어떤가? 그러면 당사자가 알아주지 않아도 해볼 만하지 않은가? 물론 이런 계산식에 몰두해서 순순한 마음이 탁해지면 안 되겠다. 이런 식이다. 내가 후배에게 밥을 사면 그 후배한테 밥을 얻어먹진 못하겠지만, 다른 선배한테 밥을 얻어먹게 된다. 내가 대학생 때 그랬다. 밥을 자주 사준 선배에게 밥을 사겠다고 하니, 까불지 말고 후배들한테나 잘 사주라고 했다. 그렇게 선배와 후배 사이엔, 밥을 사주는 선순환이 이루어졌다. 그렇다. 내가 한 선행에 대해 그 사람에게 받으면 선순환이 이루어질 수 없다. 둘 사이에서 그치기 때문이다. 선순환을 위해서라도, 내가 한 선행에 대한 대가를 그 사람에게 바라서도, 받아서도 안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