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7월 19일: 미들즈브러에서 열린 월드컵 이탈리아전 직전의 북한 팀. 그들은 이 경기에서 1-0으로 승리했다. (사진 제공: Central Press/Getty Images)
북한 축구하면 생각나는 것은 ‘Again 1966’이다. ‘Again 1966’은 2002 한일 월드컵에서 붉은 악마가 준비한 카드섹션 문구다. 북한은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무려 8강에 진출하며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1966년 월드컵에서 이탈리아를 1:0으로 눌렀던 북한처럼 대한민국도 2002 월드컵에서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 연장끝에 승리를 거두고 8강 진출을 이룬 바 있다. 묘한 인연이다.
북한의 이탈리아 격파는 역대 월드컵 이변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손꼽힐 정도로 대단한 ‘사건’이었다. 당시 북한 선수들은 개마고원에서 강력한 훈련을 받고 지치지 않는 체력으로 세계 강호들을 무너뜨렸다고 한다.
북한이 엄청난 결과를 내자 대한민국은 축구 붐 조성을 위해 박스컵 (박대통령컵) 대회를 만들었고 박스컵은 축구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아시아에서 박대통령의 위상을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는 축구가 정치적으로 이용된 대표적인 사례이기도 했다.
일제 시대에 한반도에서 축구는 꽤 인기 있는 스포츠였다.
평양과 서울의 팀이 펼치는 ‘경평축구’는 7천명-1만 명의 관중을 동원하는 엄청난 이벤트였다. 민족의 울분을 축구를 통해 푸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3도시 대항 축구전으로 명맥을 이어왔던 ‘경평축구’는 그러나 1942년 중단됐다. 이유는 일제가 수천 명의 팬들이 모이는 행사에서 조선인들이 긍지를 느끼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일제는 그러나 ‘관중의 난동이 중단의 이유’라고 밝혔다. 조선일보는 “2회 대회를 치른 후 1931년-1932년의 2년간은 일본 총독부의 조선인 집회금지 조치에 따라 중단”되었다고 보도한 바 있어 강제 중단에 무게를 두는 역사가들도 있다.
경평축구는 4년 후 재개됐다. 민족의 열망이었던 해방을 1945년 후 맞은 후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1946년 3월25일 서울 운동장(구 동대문 운동장. 현 동대문 역사 문화공원)에서 경평전이 다시 열린 것. 그런데 역사적 운명으로 이것이 경평전의 마지막 기록이었다. 38선 통행 제한령이 떨어지면서 서울과 평양의 교류는 더는 이어지지 않았다.
한국 축구계의 전설 김용식 선생을 소개한 평전 '어떤 인생'(서기원 저)에서 김용식 선생은 경평전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술회했음을 서형욱 위원은 아래 내용으로 옮겨적었다.
"경평 대항 축구전을 통해 두 도시의 시민뿐 아니라 전 조선 민족이 축구의 재미를 알게 되었다. 자기 고장, 자기 팀에 대한 자부심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조선 민족끼리 한 울타리 안에서 한 덩어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경평전의 인기는 더욱 높아만 갔다. 온 국민이 열광하는 민족의 잔치였고, 우리나라 축구 수준 향상의 촉진제 구실을 했다."
북한은 해방직 후 북한축구협회를 창설했다. 그리고 1958년 FIFA에 가입했다. FIFA에 가입한 8년 후 북한은 월드컵에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8강 진출도 놀라웠지만 당시에 사용했던 ‘사다리 전법’이 매우 독특했다.
사다리 전법은 포메이션이 3선이 아니라 2선인 극단적인 전략이다. 사다리 전법은 4-4-2와 같은 3선이 아니라 5-5 혹은 4-6 같이 선을 2개만 두는 포메이션이다. 토탈 사커는 아예 포기하고 수비수는 수비만, 공격수는 공격만 하는 방식이다.
즉, 후방에 수비수 6인이 수비진영을 지키고 긴 패스로 상대진영을 향해 공을 차면 5인의 공격수가 엄청난 스피드로 달려가 공을 잡고 슛으로 연결시키는 데 바로 이 과정이 사다리가 올라가는 것처럼 보여서 ‘사다리 전법’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이는 수비진에서의 패스가 정확하고 공격진이 스피드와 체력을 모두 갖춰야 가능한 전법이다. 사다리 전법은 그러나 월드컵 8강 포르투갈 전에서는 효과를 보지 못했다. 3골을 먼저 넣고도 에우제비우에 4골(페널티 2골)을 허용하며 3:5으로 역전패 당했다.
북한 축구는 이후 월드컵에서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1970년 월드컵에는 기권했고 1974년에는 예선 탈락했으며 1978년에 다시 기권했다.
그리고 계속 불참과 예선 탈락을 반복하다가 2010년 마침내 본선 진출을 이뤄다.
2010 남아공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사우디와 이란을 제치고 본선 진출권을 받은 북한은 본선 1라운드에서 브라질에 1:2로 패하며 선전했지만 포르투갈에 0:7로 완패하며 국제적인 망신을 당했다. 당시 포르투갈 경기는 북한에도 생중계됐다고 한다. 생중계를 결정한 누군가는 큰 책임을 졌을 것이 분명하다. 북한은 이어 코트디부아르에 0:3으로 패하며 3패로 대회를 마쳤다.
북한은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탈락했고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예선에서도 최종 예선으로 가기 전 2차 예선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도 출전하지 못했다.
북한은 지난 2016년 5월 월드컵 2차 예선 당시 노르웨이의 욘 안데르센 감독을 영입해 역사상 두 번째 외국인을 사령탑에 올렸다. 첫 번째 외국인 감독은 1994년 사령탑에 오른 헝가리의 체르너이 팔 감독이었다.
한광성은 북한 출신의 축구 선수로, 1998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는 스트라이커 포지션으로 활약하며 2017년 세리에 A 팀인 칼리아리 칼초에서 프로 경력을 시작했다. 한광성은 이탈리아 세리에 A에서 골을 기록한 최초의 북한 선수로, 2017-2018 시즌 동안 AC 페루자 칼초에서 임대되어 뛰면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이후 유벤투스 FC와 계약을 맺었으나, 출전 기회는 제한적이었다. 2020년에는 카타르의 알 두하일 SC로 이적하였지만, UN 대북제재로 인해 방출되었다. 한광성은 북한 국가대표로도 활약하며 AFC 아시안컵과 FIFA U-17 월드컵 등 여러 국제 대회에 참가했다. 현재 그는 4.25체육단에서 활동 중이다.
역사적으로 남북한 축구는 늘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경평전 이후 최초의 남북 대결은 1978년 방콕에서 열린 아시안게임 결승에서 열렸다. 당시 양팀은 0:0으로 공동 금메달을 받았다. 1980년 아시안컵 준결승도 잊을 수 없는 경기다. 당시 대한민국은 정해원의 2골로 2:1의 극적인 승리를 거뒀다. 남한은 이후 1989년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1:0 승리, 1990년 다이너스티컵 1:0 승리를 기록했다. 이듬해인 1991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통일축대회에서는 북한이 1:0으로 이겼다. 북한의 남북한 대결 첫 승리였다.
남북 단일팀이 구성됐던 적도 있었는데 바로 1991년 포르투갈에서 열린 20세 이하 월드컵이었다. 당시에는 세계 청소년 축구로 명명되었던 이 대회에서 남북 단일팀은 8강 진출에 성공했으나 8강전에서 브라질에 1:5로 완패하고 말았다.
다음은 한 블로거가 올렸던 당시 추억을 회상한 글이다.
마지막 경기인 홈팀 포루투갈전. 당시 포르투갈 대표팀에는 11년뒤 한일 월드컵에서 대한민국과 상대하게 되는 루이스 피구, 콘세이상, 주앙 핀투 등의 선수들이 포진해 있었다. 경기는 전반 심판의 애매한 판정으로 페널티 박스안에서 간접프리킥을 내주었고, 이것을 주앙핀투가 성공시키며 1-0으로 패했다.(참고로 이날 주앙핀투는 코리아를 울렸지만 11년 뒤에는 박지성에게 백테클을 하다 퇴장당하면서 포르투갈을 울리는 이이러니한 운명을 맞는다.)
이렇게 코리아는 1승1무1패 승점3점(당시는 승리시 승점 2점이 주어졌다.)으로 포르투갈에 이어 조 2위로 8강에 진출한다. 하지만 8강전에서 호베르토 카를루스를 앞세운 브라질에게 1-5로 무릎을 꿇으며 단일팀의 모든 일정은 끝나게 된다. [출처] [U-20월드컵]1991년 남북 단일팀의 추억|작성자 Andr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