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0년: 인도의 로열 엔지니어스 축구 팀 구성원들. (사진: Otto Herschan Collection/Hulton Archive/Getty Images)
대영제국이 식민지 나라에 들고들어간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성경이었고 다른 하나는 축구였다. 대영제국이 인도로 들고간 두 가지 중 하나는 축구였고 캘커타의 공공기관 직원들과 영국 군인들은 함께 축구를 하며 이 스포츠가 인도에 자리잡도록 했다.
인도 사람들은 영국인들이 축구 하는 것을 보고 자신들도 축구팀을 구성했고 영국인팀과의 대결에서 승리를 거두며 축구가 인도에서 인기를 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11년쯤의 일이다. 당시 경기장에는 스탠드가 없었다. 하지만 약 1만 명의 관중이 몰려들어 인도의 승리를 목격했다. 당시 경기가 열렸던 캘커타는 인도 축구의 성지가 됐다.
아시아에서 비교적 일찍 축구를 받아들인 나라인 인도는 아시아 최초로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지만 축구화 문제로 출전을 거부했고 이후 단 한 번도 본선에 나서지 못했다. 인도는 1950년 월드컵 당시 맨발로 경기에 출전하겠다고 요청했다가 FIFA에 의해 거부당하며 출전을 포기했다. 항간에는 인도가 먼 나라로 이동할 경비가 없어 축구화 핑계를 댔다는 소문도 있다. 인도는 이후 1982년 월드컵 때까지 지역예선에 아예 불참했다.
인도는 아시아 국가가 축구에 신경 쓸 수 없었던 1950년대 아시아 축구의 강자였다. 1951년, 62년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받았고 1956년에는 올림픽 4강에 올라 아시아 첫 올림픽 4강 진출국으로 기록됐다.
1960년대 이후에 인도는 아시아의 맹주로서의 위치에서 내려왔고 1970년대와 80년대에는 아시아에서도 중하위권으로 처졌다. 인도는 1986년 월드컵부터 아시아 예선에 참가했는데 모두 예선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아깝게 탈락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인도는 1990년대에 의욕적으로 축구 투자에 나섰다. 1996년에 전국 리그가 창설됐고 필립스, 코카콜라 등의 대기업들이 스폰서로 나섰다. 외국 선수들이 인도 리그로 몰려들었다. 하지만 축구 수준이 향상되지는 않았다. 인도는 늘 FIFA 랭킹의 하위권을 멤돌았다. 큰 스폰서도 인도 리그를 떠났다.
인도는 포기하지 않았다. 2013년에는 슈퍼리그라는 프로리그를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슈퍼리그는 2014년에 평균 관중 동원 2만6000명을 기록했고 이는 2017년에는 1만6000명으로 떨어졌지만 여전히 아시아에서 최고 수준의 관중 동원 기록이다.
닐슨의 조사에 따르면 인도에서 축구에 대한 관심은 2013년 30%에서 2018년 45%로 크게 뛰어 올랐다. 특히 도시에서 축구의 인기는 높은 편이다. 16세에서 24세까지의 젊은이들 중 53%는 축구를 좋아한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인도는 그러나 여전히 크리켓에 미친 나라다. 크리켓 때문에 축구의 언론 노출은 적은 편이다. 유소년 축구도 발전하지 않았고, 축구를 직접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
묘하게도 세계 인구 순위 1위부터 4위 국가는 축구를 잘 못하거나 축구가 최고 인기 스포츠가 아니다. 이 4개국은 모두 2018년 러시아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지 못했다.
중국(14억명), 인도(14억명), 미국(3억2천만명), 인도네시아(2억6천만명)는 축구 강국이 아니다. FIFA는 따라서 이 나라들에 신경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