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 8월 23일: 1997년 8월 23일에 열린 1997/98 1.분데스리가 경기에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보훔을 5:2로 이긴 경기, 스테판 샤푸이자가 4:1로 만드는 골을 넣은 후 모습. (사진: Andreas Rentz/Bongarts/Getty Images)
스위스는 유럽에서 축구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나라다. 스위스에 있던 영국인 학생들이 풋볼을 전파하면서 첫 수입국이 되었던 것. 1850년대와 1860년대의 일이다.
당시 스위스에는 영국 유학생이 많았다. 알프스의 멋진 전경, 부유함, 은행과 엔지니어 분야의 발전이 영국 유학생들을 끌었다. 영국 학생들은 로잔, 제네바, 취리히에서 유학했다.
영국 유학생들은 1848년에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작성된 현대적 규칙에 따라 축구를 했던 사람들이다. 문헌에 따르면 기원전 2-3세기에 중국에서 고대 그리스시대에 공차기 놀이가 있었지만 지금과 같은 규칙으로 경기가 진행된 것은 1848년이 첫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스위스와 영국 학생들의 비공식 축구 경기로 시작된 스위스 축구는 로잔 풋볼&크리켓 클럽의 창설로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860년대와 70년대에 속속 축구팀이 창설됐다.
스위스는 영국과 함께 축구가 유럽으로 전파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축구의 부종가’쯤이 된다. 스페인에서는 영국에 의해 축구가 심겨졌지만 이 나라에서 축구가 인기를 끈 것은 스위스인이 세운 FC 바르셀로나가 창단한 1899년 이후다. 이탈리아도 스위스로부터 축구를 전수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기 이탈리아팀의 감독과 주장은 스위스에서 축구를 배운 인물이었다.
스위스는 전통적으로 다민족, 다문화 국가다. 스위스는 오스트리아 침략군에 대항하기 위해 통합하고 연합해야 했고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여러 주가 연합을 했다. 스위스 사람들은 ‘나라를 지키는 일’에 온힘을 기울였고 전국민의 군인화를 이끌었다. 스위스는 군사적으로 강했고 이는 이 나라가 중립국이 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됐다. 중립국이 되려면 군사력이 강력해야 한다. 그 어느누구도 시비를 걸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중립국이기에 세계 모든 기구와 회담이 스위스에서 설립된다. FIFA 사무소가 스위스에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중립국의 위치에 있음은 독일의 회생에 큰 도움을 주었다. 독일어가 공용어 중 하나인 스위스는 2차 세계 대전 후 독일(서독)이 첫 국제 경기를 치를 수 있도록 맞대결을 주선해준 나라이다.
전 세계가 독일(서독)에 대해 적대적인 당시 상황에서 스위스는 고마운 나라였다. 독일(서독)은 또한 1954년 스위스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챔피언 자리에 오르는 ‘베른의 기적’을 경험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화마를 경험하지 않은 유일한 유럽 국가였던 스위스에서 열린 첫 전쟁 후 월드컵에서 서독이 챔피언이 된 것은 많은 것을 의미했다.
단순히 축구 경기에서의 승리라기보다 나라가 일어서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됐던 것이다. 당시 스위스 월드컵은 또한 TV로 생중계가 있었던 첫 번째 대회였다. 유럽 방송 연합은 1954년 스위스 월드컵 9경기를 유럽 전역으로 생방송으로 내보냈다. 당시 방송권료는 일푼도 없었다. 대신 TV 수상기가 엄청나게 판매됐다.
독일은 1989년 통독을 이룬 후에 스위스에 연락해 통독 후 첫 경기를 갖자고 제의했다. 과거 호의를 베푼 역사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스위스팀은 독일 슈트트가르트로 달려가 통독 후 첫 경기를 가졌다.
전 스위스 대표팀 감독이었던 울리히 슈틸리케는 “양국은 축구를 통해 결속이 잘 되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풋볼리스트의 류청 기자에 따르면 슈틸리케는 스위스 감독이었을 당시 독일어권 중심의 선수 선발의 관행을 깨고 다양한 선수를 국가대표로 선발함으로써 스위스 축구 발전에 기여했다고 한다. 슈틸리케는 1989년부터 1991년까지 스위스 대표팀 사령탑에 오른 바 있다.
진정한 다문화 축구가 포문을 열었다. 그리고 다문화에 대한 열림은 스위스의 축구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해리슨 스탁(The Global(ized) Game: A Geopolitical Guide to the 2014 World Cup의 저자)은 코소보, 코트디브와르, 마케도니아, 터키에서 온 이민 1세대, 2세대 덕분에 스위스 축구가 발전했다고 설명했다.
스위스는 지난 2016년 UEFA 유럽 챔피언십에서 프랑스에 이어 이민배경이 있는 선수를 보유한 팀 2위에 오른 바 있다. 프랑스는 65%였고 스위스는 61%였다. 이는 다시 한 번 단일민족, 단일문화로는 좋은 결과를 내기가 어려움을 알려주는 지표이다. 물론 늘 예외는 있다.
이러다보니 특이한 현상이 생기기도 한다. 스위스의 자카 형제는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났지만 상대 나라 선수로 만난 특별한 경험을 했다. 그라니트 자카와 타울란트 자카 형제는 2016년 유로에서 각각 스위스, 알바니아 대표 선수로서 출전해 맞대결을 펼쳤던 것이다.
코소보계 알바니아 출신 부모에게서 태어난 두 선수는 스위스 바젤에서 성장했는데 형 타울란트는 핏줄을 따라 알바니아 대표팀을, 동생은 자신이 자란 스위스의 대표팀 합류를 받아들였다. 이 경기에서 두 선수의 어머니는 스위스와 알바니아 국기가 절반씩 있는 티셔츠를 입고 두 아들 모두를 응원했다.
조선일보는 스위스 축구가 성장한 이유를 다문화/다민족의 힘으로 보았다.
스위스는 정치적으로 중립국가이다. 그로 인해 인구의 20%가 이민자 출신이다. 스위스의 주변 국가인 이탈리아, 코소보, 터키 출신들이 많다. 이민자들의 후세들은 스포츠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축구도 예외는 아니었다. 축구 선수 중 40%가 이민자 또는 외국계로 조사됐다. 유소년 축구 선수 비율은 50%를 넘어 60%를 육박하고 있다. 독일월드컵에 출전할 현 대표팀에도 이 같은 현상은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다. 베스트11 멤버 중 5명의 몸속에 이민자의 피가 흐르고 있다. (출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6/03/23/2006032370271.html)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 뛴 스위스 선수들은 대부분 다문화/민족 배경을 갖고 있었다. 일단 감독이 보스니아 출신의 블라디미르 페트코비치였다. 그리고 피트코비치의 핵심 선수는 형과 다른 나라 유니폼을 입고 뛰었던 그라니트 자카(아스날 미드필더)다. 주장인 슈테판 리히트슈타이너는 다인종/다문화 배경은 아니지만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다국어 능통 선수였다.
스위스는 2017년까지 인구가 820만 명이었다. 이중 독일계가 65%, 프랑스계가 18%, 이탈리아계가 10%를 차지한다. 언어는 독일어, 프랑스, 이탈리아어가 공용어이다.
스위스하면 생각나는 축구계 대표적인 인물은 제프 블래터다. 1998년부터 2016년까지 FIFA 회장직을 역임한 그는 스위스 로잔대학교 출신이다. 블라터는 재임 기간 동안 관료주의적이고 재정쪽에서의 부패로 인해 실패한 회장으로 여겨진다.
선수 중에는 스테판 샤퓌자가 역대 최고의 선수로 손꼽힌다. 샤퓌자는 분데스리가 도르트문트에서 106골을 넣은 역대 최고의 외국인 선수였다. 그는 차범근의 외국인 선수 최다 득점 기록을 넘어선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