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소련 대표팀 선수들]
영국의 선원들은 축구 전도자들이다. 이들이 가는 곳마다 축구를 퍼뜨렸는데 러시아도 영국 선원들에 의해 축구를 접하게 된 나라다. 1860년대의 일이다.
그리고 30년쯤이 지난 1890년대에 본격적인 축구 전파가 시작되었다.
축구 전파를 본격적으로 하게 된 사람도 영국인 기업가다. 한 영국인 경영자가 노동자들의 보드카 과음 습관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자 축구를 도입했다고 한다.
그렇게 도입된 축구는 러시아 내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급기야 1912년에 러시아축구협회가 발족했다. 1917년 볼셰비치 혁명이 일어났다. 러시아는 소비에트연합(소련)이 되었고 축구협도 당연히 소련축구연합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차 세계대전과 혁명으로인해 축구의 확산이 잠시 중단됐다. 많은 유명 선수들이 전쟁으로인해 사망했거나 이민을 택했기 때문이다.
1920년대 중반에는 이전 형태의 축구팀은 모두 사라졌고 공장이나 정부기관을 대표하는 선수들이 축구 시합에 참여했다. 군인팀이 많았다. 따라서 공장에 다녔던 젊은이들과 군인들이 공장일을 하거나 군복무를 하면서 축구선수로 활동했다. 이같은 현상은 1950년대, 60년대까지 이어졌다.
1930년대-50년대에 소련 축구는 강했다. 장기 독재 집권을 했던 스탈린이 강한 소련을 세상에 보이기 위해 축구팀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련은 전쟁 기간에도 축구 경기가 열리도록 했다. 전사하거나 굶어죽는 사람이 나타나도 축구경기에는 8,000명의 팬들이 모였다.
스탈린은 강한 소련을 선보이는 목적 외에도 다민족 국가들을 통합하는 데 축구를 사용했다. 또 외교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축구를 이용했다. 1952년에는 영국과의 우호관계를 위해 아스날을 초청해 친선경기를 갖게 했다.
소련은 1955년에는 동독와 서독이 대화를 시작하도록 축구를 사용할 것을 권고했다. 소련은 서독과 친선 경기를 가지면서 동서독, 소련 3개국의 대화가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 1500명의 독일인들이 친선경기를 보기 위해 러시아 방문을 허가 받았다. 소련은 당시 공산주의 통치하의 통독을 추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소련 사람들은 당시 정권이 정치를 위해 축구를 이용한 목적과는 다르게 축구장에서만큼은 자유를 누렸다. 당시 예술, 문화, 영화 등은 메시지를 전할 때 정부의 스크린을 당했지만 축구만큼은 그럴 일이 없었다. 물론 심판의 매수같은 것은 있었지만 다른 분야에 비교한다면 축구에는 비교적 자유가 허용됐다. 축구에 미리 짜여진 각본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1950년대 대표적인 선수는 바로 전설적인 골키퍼 레프 야신이다. 야신도 공장에서 일했을 당시 축구를 처음 접한 바 있다. 야신은 소련이 멜버른 올림픽과 1960년 UEFA 유로 유럽 네이션스컵에서 소련이 챔피언에 오르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원조 거미손’, ‘원조 문어발’이었던 야신은 2018년 러시아 월드컵 포스터의 주인공이 됐을 정도로 전설적인 축구선수로 기록됐다.
러시아는 소련이었을 때 강한 모습을 보였다. 소련이었을 당시 월드컵 8강 3회 진출, 4강 1회 진출을 기록했다. 소련이 해체된 후 러시아라는 이름으로는 1994년, 2002년, 2014년에 월드컵 진출을 이뤘지만 모두 1라운드에서 탈락했다.
소련의 공장 축구, 노동자 축구, 산업역꾼 축구가 프로축구보다 세계 무대에서 더 강했던 것이다. 소련이 해체된 후 독점기업들이 축구팀을 인수해 대자본을 투자해 외국 선수 영입에 나섰는데 이는 러시아 국가대표의 성장에 악영향을 미쳤다. 무분별한 외국 선수영입이었고 자국 선수 중심의 리그를 키우는 데는 별관심이 없는 구단이 대부분이었다.
소련이 해체된 후 축구에 악영향을 미친 다른 부분은 훌리건의 등장이다. 영국 훌리건을 흉내내 시작된 러시아 훌리건은 유럽의 훌리건과는 또다른 수준에 올라섰다. 유럽의 훌리거니즘은 주먹싸움과 마초와 같은 행동이 대표적인 이미지였다.
러시아의 훌리거니즘은 달랐다.
러시아의 훌리건들은 ‘의도적인 싸움’을 위해 근력을 운동을 하며, 무술을 배웠다. 단순히 싸움만을 하는 게 아니라 싸움을 잘하기 위해 훈련을 한다는 것이다. 러시아 훌리건은 훌리건의 원조인 잉글랜드 훌리건들과 지난 유로 2016에서 맞붙어 난투극을 벌였고 90여명이 체포되는 일이 있었다.
러시아 훌리건들은 잉글랜드 훌리건들이 ‘소녀’와 같고 자신들은 강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했다. 즉 영국인들은 연약한 훌리건이고 자신들이 진짜 훌리건임을 보여주고 싶어했던 것이다. 러시아 훌리건들에게 우발적인 폭력은 없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야만적인 행동을 하려고 한다. 러시아 훌리건들은 조직화되어 있고 그들 나름대로 효율성을 중요시한다.
러시아 정부는 2018년 러시아 월드컵이 훌리건으로 문제가 불거지지 않도록 대대적인 소탕 작업을 벌였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의 러시아 스타는 1996년생인 알렉산드르 골로빈이다. CSKA 모스크바에서 뛰었던 골로빈은 기술, 패스, 판단력 등이 고르게 뛰어난 선수다.
러시아의 U-21 감독이었던 드미트리 쿠무카는 골로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갖춘 기본 테크닉, 패스 그리고 상황 판단력은 또래들을 훨씬 넘어섰다. 경기 양상을 바꾸는 키 패스 한방을 갖춘 선수들은 축구계에서 늘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러시아는 홈의 잇점을 안고 8강까지 진출했으나 8강에서 승부차기까지 접전끝에 크로아티아 패해 8강 진출에 만족해야 했다.
세계 반도핑 기구(WADA)는 2019년 회의에서 러시아의 도핑 규정 위반을 이유로 4년 동안 모든 국제대회 출전 정지 조치를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러시아는 카타르 월드컵에서 실격당했다. 대륙별 선수권 대회는 금지되지 않아 유럽 예선 참가가 가능했지만, 본선에 진출하더라도 러시아라는 국호, 국기, 그리고 국가대표팀 로고를 사용할 수 없으며, 대회에서 세운 기록도 러시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공식 기록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카타르 월드컵 유럽 예선에서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러시아는 최종 승리 시 러시아 축구 연합 또는 러시아 출신 올림픽 선수와 비슷한 이름으로 월드컵 본선에 진출할 수 있었으나, 푸틴과 러시아군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무기한 자격 정지 처벌을 받게 되었다. 이로 인해 한동안 월드컵 출전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2026년 월드컵도 전쟁으로 인한 징계가 해제되기 전까지는 진출할 수 없다. 만약 전쟁이 끝나고 유럽 축구 연맹과 FIFA가 예선 및 본선 진출을 승인해 주더라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경기 중 많은 비난과 야유를 받을 가능성이 크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분 중에 러시아를 방문하는 분이 있다면 러시아의 한 외국인이 쓴 다음 글을 참조하라. https://kr.rbth.com/society/2014/03/03/43987
“러시아 여성은 심지어 빵을 사러 나가는 등 잠시 외출할 때도 화장을 하고 하이힐을 신는다.유럽 중심부에 가까워질수록 여성들이 신는 구두의 굽 높이는 줄어든다. 러시아 사람들의 또 다른 특징은 잘 웃지 않는다는 점이다. 러시아 사람들은 당신에게 진심으로 공감할 때만 미소를 짓는다. 다른 사람들보다 당신을 왠지 모르게 특별히 나쁘게, 더 심하게 대하는 것 같아 처음에는 불편하게 느껴질 것이다. 러시아에서는 ‘어떻게 지내세요’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오랫동안 그리고 마음 속까지 다 들려준다. 러시아 음식에서 놀라운 점은 바로 마요네즈가 많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마요네즈는 새해맞이용 '올리비예(Оливье)' 샐러드와 '외투 입은 청어(селедка "под шубой")' 샐러드는 물론이고 다른 많은 샐러드에도 들어간다. 심지어 마요네즈를 바른 고기를 오븐에 넣어 구우려고도 하는데, 마요네즈가 차가운 샐러드 소스여서 열을 가하면 상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온 세상이 알고 있는데도 이런 일은 널리 퍼져 있다.”
한국과 소련(러시아)의 축구 인연은 아나톨리 비쇼베츠 감독의 영입을 빼놓을 수 없다. '88 서울 올림픽 축구에서 소련이 금메달을 땄을 당시 감독이었던 비쇼베츠는 1994년 미국 월드컵 이후 한국 팀의 감독을 맡아 당해 아시안 게임에 참가했다. 당시 아시안 게임에는 연령 제한이 없었는데, 한국은 4강전에서 우즈베키스탄에 0:1로 패했다.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서도 사령탑에 올랐던 비쇼베츠는 가나에 승리해 한국에 올림픽 사상 첫 승리를 안겨줬지만 이어 멕시코와 이탈리아에 패해 조예선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당시 한국은 비기기만 해도 8강 진출을 이룰 수 있었으나 종료 직전에 한골을 먹는 바람에 1승2패로 대회를 마쳤다.
겉으로 보이는 성과는 미미했지만 당시 비쇼베츠는 선수 선발권, 작전권, 코칭 스태프 선임 등 모든권한을 요청해 대한축구협회의 '정치'에서 벗어난 첫 번째 대표팀 감독이었고 꼼꼼한 준비로 축구 팬들 사이에 좋은 평판을 누린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