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7월 30일: 우루과이가 몬테비데오, 우루과이에서 열린 FIFA 월드컵 결승전에서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또 하나의 골을 기록하고 있다. 우루과이는 이 경기에서 4-2로 승리하며 우승 트로피를 차지했다. 필수 크레디트: Allsport/Hulton
브라질, 아르헨티나 외에 남미에는 축구 잘하는 나라가 즐비하다. 우루과이, 칠레, 콜롬비아, 페루 등은 세계적인 수준이다. 따라서 국가수는 많지 않아도 월드컵 본선행 티켓은 4.5장이 주어진다. 2018 러시아 월드컵 본선 진출을 위한 대륙별 티켓 배정은 다음과 같았다.
개최국(러시아) : 1장 유럽 : 13장 남미 : 4.5장 아프리카 : 5장 아시아 : 4.5장 북중미/카리브 : 3.5장 오세아니아 : 0.5장
남미에는 총 10개 나라가 월드컵 예선에 참가하는데 사실 7-9개 나라가 월드컵에 나가도 세계 수준에 뒤떨어지지 않는다. 어떤 이는 축구 수준이 낮은 아시아에 주어진 4.5장은 너무 많기에 남미에 한두 장 넘겨줘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남미에는 앞서 말한 축구의 강호 브라질, 아르헨티나 외에 우루과이, 콜롬비아, 페루, 칠레, 파라과이, 에콰도르, 볼리비아 등 축구에 몰입되어 있는 나라들이 있다. 왜 그럴까?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축구가 가장 빨리 전달된 대륙이기 때문이다.
우루과이는 영국출신 체육학 교수인 앤젤 배자와 영문학 교수인 레슬리 풀을 통해 축구를 받아들였다. 풀 교수는 1891년 6월 최초의 축구 클럽을 만들었다. 축구는 얼마 되지 않아 우루과이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890년대와 1900년대에 우루과이에서의 축구의 인기는 다른 스포츠가 도무지 따라올 수 없는 수준으로 치솟아 올랐다.
축구는 또한 우루과이의 국가정체성 형성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19세기말 유럽에서 많은 사람들이 우루과이로 이주를 했는데 당시 이들과 현지인들을 묶어줄 어떤 문화가 필요했다. 뚜렷한 그 무엇을 찾던 중에 축구가 소개되었고 축구는 급속도로 확산했다.
그 인기가 얼마나 높았는지 이 작은 나라가 1930년 열린 사상 첫 월드컵을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1930년 당시 10만 명을 수용하는 센테너리 경기장을 건립했다.
월드컵을 주최하기에 앞서 우루과이는 아르헨티나와 함께 남미 축구의 부흥을 이끌었다. 남미 국가간의 대항전을 열면서 축구 팬들의 관심을 모았던 것.
우루과이는 행정과 조직에서 경험이 있었고 축구에 대한 인기가 높았기에 첫 월드컵을 유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1924년 파리 올림픽,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 2연속 금메달을 딴 것도 첫 월드컵 주최의 기폭제가 되었다.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 축구 결승]
1920년대와 30년대는 우루과이 축구의 황금기였다. 월드컵은 이 모든 상황이 맞아 떨어져 시작되었는데 특히 올림픽 조직위가 프로 선수들의 올림픽 출전을 금하면서 축구의 축제가 필요하다는 중론에 따라 ‘축구만의 올림픽’인 월드컵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우루과이는 출전 선수들의 비용을 모두 대겠다는 조건으로 첫 대회 유치에 성공했다. 당시 우루과이는 산업의 급속한 발전으로 비용을 대는 것뿐만 아니라 대규모 스타디움 건설도 가능했다.
각 대륙의 선수들은 최대 4주 동안 배를 타고 우루과이로 이동했다. 16개국이 초청되었는데 이중 13개국만 참가했다. 이 대회에서 우루과이는 초대 챔피언이 됐다. 심판의 석연치 않은 판정과 폭력 사태가 있긴 했지만 ‘비교적 성공적으로’ 대회를 마쳤다.
우루과이는 올림픽 및 월드컵에서의 성공을 발판삼아 1932년에 프로축구를 탄생시켰다.
제2회 월드컵은 유럽에서 열리게 되었다. 하지만 우루과이는 제2회 이탈리아 월드컵, 제3회 프랑스 월드컵에는 출전하지 않았다. 1934년 이탈리 월드컵과 1938년 프랑스 월드컵에 참가하지 않은 이유는 자신의 나라에서 열린 대회에 일부 유럽국이 출전하지 않은 것에 대한 일종의 보복성 불참이었다.
우루과이는 18년 후인 1950년, 브라질 월드컵에 참가해 두 번째 우승의 놀라운 성적을 냈다. 그리고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 출전 4강이라는 좋은 결과를 냈다.
축구에서의 좋은 성적으로인한 관심 집중은 우루과이가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민주화된 나라이고 살기 좋은 나라라는 점을 부각시키기에 좋았다.
우루과이는 이후에도 축구계의 ‘파워하우스’였다.
우루과이는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8강, 1970년 멕시코 월드컵 4강의 성적을 냈다. 그런데 이후에는 암흑기로 들어간다. 1982년까지 예선 탈락을 하거나 조별리그에서 떨어졌던 것. 우루과이는 1986년 멕시코 월드컵 16강,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16강으로 체면치레를 했으나 이전의 영광을 회복하지는 못했다.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4강에 올라 이전의 영광을 재현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세계 축구가 점점 평준화되면서 월드컵에서의 연속 성공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우루과이는 1930년 첫 월드컵 개최 당시 건국 100주년이라는 걸 대의적인 명분으로 내세웠다.
우루과이는 2030년 월드컵 주최를 원하고 있다. 이는 월드컵 주최 100주년이라는 또다른 명분하에서다. 우루과이는 아르헨티나, 파라과이와 함께 100주년 기념 대회를 열기를 원하고 있다.
한편 우루과이 역대 최고의 스타는 알시데스 기지아다. 그는 1950년 브라질 월드컵 결전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역전골을 넣고 조국에 두 번째 우승컵을 안겨줬고 브라질 국민에는 비극을 안겨준 인물이다. 그는 FIFA 월드컵 역대 최고의 인물로도 선정된 바 있다.
당시 골을 허용했던 브라질의 골키퍼 모아시르 바르보사는 평생 브라질의 역적으로 살아야했다. 바르보사는 어디를 가든 홀대를 받았고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브라질에서는 아무리 죄를 많이 지어도 43년형 이상의 형을 선고받지 않는데 나는 그 경기에서 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50년 동안 죄인처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