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by Shutterstock. 잉글랜드 축구 대표팀의 주장인 해리 케인(오른쪽)과 사우스게이트 감독
[들어가는 말(매회 반복)]
축구는 단순히 공을 차는 게임일 뿐일까요? 이 질문은 종종 축구에 대한 전 세계적인 열정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제기됩니다. 저는 2002년 한일 월드컵 동안, "나는 축구 경기를 단 한 게임도 보지 않았다. 공을 여기저기 차며 네트 안에 넣는 것에 전 세계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한 미국의 지인을 기억합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친구도 "공을 골대 안에 넣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어서 사람들이 저렇게 난리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이러한 견해들은 축구를 단순한 공놀이로 보는 일부 사람들의 관점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전 세계 수백만 팬들에게 축구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그것은 인생의 드라마를 구현하고, 팀워크, 전략, 인내, 그리고 끊임없는 경쟁 정신을 반영합니다.
축구는 인생과 마찬가지로, 성공을 위해서는 팀워크, 전략, 때로는 조금의 행운이 필요합니다. 이 게임은 협력, 열심히 일하는 것, 승리와 패배를 다루는 귀중한 교훈을 가르칩니다. 또한, 많은 문화에서 축구는 언어, 국적, 사회적 지위를 초월하는 통합의 힘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함께 불러 모으고, 공동체 의식과 소속감을 만들어냅니다.
축구의 매력을 이해하는 것은 단순히 골을 넣는 행위를 넘어섭니다. 게임이 주는 건전한 흥분, 예측할 수 없는 결과의 긴장감, 그리고 전 세계 팬들의 공유된 경험에 관한 것입니다. 선수들과 팬들의 열정과 헌신은 축구를 단순한 게임을 넘어서, 인간 경험의 고저를 포괄하는 세계적 현상으로 만듭니다.
5. 영국연합국의 축구, 정치, & 문화
‘대영제국’의 정식 국호는 그레이트 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이다. 일반 명칭은 영국연합왕국(United Kingdom)이다. 잉글랜드(England), 스코틀랜드(Scotland), 웨일스(Wales), 북아일랜드(Nothern Ireland)로 구성되어 있다. 아일랜드는 떨어져 나간 독립국가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각 국가는 자치의 분위기가 강했음에도 영국연합왕국(UK)에서 완전히 떨어나가진 못했다. 웨일스와 스코틀랜드의 경우 지금도 자치 국가로 존재하지만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잉글랜드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 앞서 거론했는데 아일랜드는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을 했다. 잉글랜드와 아일랜드는 한일 관계와 비슷하다. 그런데 아일랜드와 형제인 북아일랜드는 여전히 영국에 속해있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웨일스는 각각 FIFA에 따로 가입돼 있다. 그러나 올림픽에선 영국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뛰어야 한다.
월드컵에는 4개국 모두 따로 출전하게 된다. 월드컵 역사상 4개국 모두 함께 출전한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1958년 스웨덴 대회였다.
당시 잉글랜드는 3무를 기록해 8강 진출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웨일스는 같은 3무였지만 8강에 올랐다. 북아일랜드는 1승1무1패로 역시 8강 진출에 성공했다. 스코틀랜드는 1무2패로 탈락했다.
2022 카타르 월드컵에는 잉글랜드와 웨일스만 본선에 진출했다. UK의 축구를 살펴본다.
Photo by Shutterstock. 웨일즈의 수퍼스타 개러스 베일.
웨일스
웨일스는 월드컵과 인연이 없는 나라였다.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서 8강에 든 것을 제외하면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적이 한 번도 없다가 2022 카타르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 카타르 월드컵에서 웨일스 관련 관전 포인트는 축구 종주국이자 같은 영연방 라이벌인 잉글랜드와 같은 조에 속하게 된 것이다. 영국 축구 더비가 카타르에서 열리게 됐다.
웨일스는 유럽 챔피언십에서도 매번 예선 탈락하다가 유로 2016 당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예선 탈락이 전매특허였던 팀이 무려 4강에 진출했던 것.
특히 8강전에서 러시아 월드컵 당시 ‘황금세대’로 주가를 올린 벨기에에 3-1로 역전승을 거두며 웨일스는 전 세계 축구계를 놀라게 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축구로서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웨일스는 지리적으로 잉글랜드와 붙어 있지만 고유의 프리미어리그가 있다. 그럼에도 카디프시티, 스완지시티, 렉섬 등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 속해 있다. 즉 웨일스에 있는 도시에서 홈경기를 치르지만 웨일스가 아닌 잉글랜드 소속인 것이다.
웨일스가 유로 2016에서 대성공을 거둔 이유는 ‘팀 스피릿’에 기인한다. 강해진다는 구호를 함께 외치며 강한 팀을 만들었다. 축구장에서 모든 것을 팀에 맞추는 선수들만 뽑으려고 했고 그들과 함께 ‘끈끈한’ 팀을 만들었다. 크리스 콜먼 감독의 작품이었다.
콜먼 감독은 그러나 2018 러시아 월드컵 지역 예선을 통과하지 못한 후에는 사임하고 선더랜드의 사령탑에 올랐다. 그리고 오래되지 않아 중국의 허베이 화샤 싱푸로 둥지를 옮겼다. 콜먼 감독은 월드컵 지역 예선 기간에 개러스 베일, 애론 램지, 조 앨런이 부상으로 항상 함께하지는 못했던 것이 월드컵 진출 실패의 이유라고 설명했다.
세 선수는 유로 2016년에서 맹활약했던 웨일스의 스타 선수들이다. 이들은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는 나란히 출전할 것으로 보인다.
베일은 웨일스 축구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선수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베일은 엄청난 스피드와 극강의 왼발로 웨일스 축구를 톱레벨로 올려놓았다. A매치 총 104경기에 출전한 베일은 40골을 기록했고 아일랜드의 주장으로서 뛰게 된다.
웨일스는 민초 레벨의 축구가 발전되어 있다. 즉 일반인들이 축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많다는 것이고 이는 재능있는 젊은 선수들을 발굴해낼 수 있는 좋은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웨일스의 ‘민초 레벨’ 축구는 UEFA에서 인정 받는 최고 수준이다. 특히 코칭 프로그램이 세계 최고 수준이다. 웨일스는 세계 최초로 축구 교육을 온라인으로 실시하기도 했다.
이 온라인 축구 교육 프로그램에는 티에리 앙리, 패트릭 비에라, 마르셀 드사이 등이 참여했다.
Photo by Shutterstock. 스코틀랜드의 축구 영웅 알렉스 퍼거슨
스코틀랜드
스코틀랜드는 웨일스, 아일랜드, 북아일랜드보다 훨씬 더 일찍 축구를 받아들였다. 1867년의 일이다. 초창기에 스코틀랜드에서 축구의 인기는 대단했다. 축구를 하는 사람을 보지 않고 스코틀랜드 도시를 거쳐가기는 어려운 일이라는 말이 나오기까지 했다.
인기가 높다보니 축구 수준도 높았다. 그래서 초창기에도 잉글랜드를 종종 누르기도 했다.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 축구에 영향을 미친 것은 누구나 인정한다. 당시 잉글랜드에서 뛴 스코틀랜드 이민자 출신 선수의 수는 엄청나게 많았다.
1890년대에 열린 잉글랜드와의 경기에 5만 명의 관중이 운집했을 정도이니 스코틀랜드에서 축구의 인기는 대단했다. 오늘날도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는 레인저스와 셀틱의 지역 더비는 이미 1890년대부터 시작해 130년의 전통을 자랑한다.
셀틱과 레인저스는 종교 갈등이 축구장의 라이벌로 등장해 지금까지 그러한 경쟁이 이어지고 있다. 셀틱의 서포터들은 주로 가톨릭 신자(아일랜드계)들이고, 레인저스는 스코틀랜드계 개신교 신자들이다. 양팀이 경기를 할 때 셀틱 서포터들은 아일랜드 국기를 흔들고 레인저스 팬들은 영국 국기를 흔들며 응원한다.
축구 저널리스트 서형욱은 두 팀의 라이벌 관계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레인저스와 셀틱의 배경에는 스코틀랜드 사회의 뿌리깊은 민족, 종교적 분화가 자리잡고 있다. 개신교 노동자들을 위해 설립된 레인저스는 가톨릭 신자 선수의 영입을 금지하는 전통을 오랫동안 유지해왔다. 반면 글라스고 동부 지역을 거점으로 하는 셀틱은 가난한 아일랜드 이민자를 위한 클럽으로 가톨릭 교리 안에서 운영되는 팀이다. 종교적으로 색채를 완전히 달리하는 두 팀이 같은 도시를 연구로 하게 되니 뜨거운 경쟁관계가 지속되는 것은 당연지사다.” (유럽 축구 기행: 세계 축구 중심에 가다, 서형욱, p.148)
‘올드펌 더비’로 불리는 양팀간의 대결은 때론 폭력성을 띠기도 한다. 하지만 스코틀랜드 축구하면 폭력성은 비교적 덜 생각한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잉글랜드의 훌리건을 보며 잉글랜드보다 더 수준이 높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비폭력을 정체성으로 삼았다.
스코틀랜드는 모든 분야에서 잉글랜드를 늘 의식했고 축구 분야에서도 그랬다. 그래서 축구를 세상에 알리는 데에도 잉글랜드와 함께 앞장섰다. 20세기 초반 스코틀래드 축구팀이 남아공을 방문했을 당시 수만 명의 팬들이 몰려들었을 정도로 이 나라는 ‘축구 종가’의 둘째 동생 역할을 맡았다.
초창기에 스코틀랜드는 짧은 패스를 사용하는 축구를 전 세계에 알렸다. 짧은 패스 중심으로 놀라운 경기를 펼친 스코틀랜드는 1872년부터 10년 동안 잉글랜드를 7승2무2패로 압도했다. 스코틀랜드가 짧은 패스를 잘하게 된 이유는 지역적인 특성 때문이다. 스코틀랜드는 바람이 많이 부는 지역이 많아 정확한 패스를 위해 숏패스를 사용했다고 한다.
축구 초창기에 스코틀랜드는 축구가 확산하는 데 영향을 미쳤지만 축구 세계화가 이뤄진 후에는 이렇다 할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스코틀랜드는 1954년 스위스 월드컵부터 세계 무대에 나섰지만 8차례의 본선에서 단 한 번도 조별리그를 벗어나지 못했다.
운도 따르지 않았다.
1974년 서독 월드컵에서 1승2무로 선전하고 유고, 브라질 모두 1승2무였지만 골득실에서 뒤져 2라운드로 진출하지 못했고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1승1무1패를 기록했지만 네덜란드에 골득실에 밀려 역시 조별리그를 통과하지 못했다.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서는 소련과 1승1무1패로 같은 기록을 냈지만 역시 탈락했다.
불운이 계속된 월드컵이었고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이후에는 아예 본선 진출도 이루지 못했다.
스코틀랜드는 최근 10여년 간 영국 4개 나라 중 최하위 성적을 기록했다. 2022 카타르 월드컵 유럽 예선에서 스코틀랜드는 강호 덴마크, 이스라엘, 오스트리아, 페로 제도, 몰도바 등과 같은 조를 이뤄 덴마크에 이어 2위에 올라 플레이오프에 나갔고 우크라이나, 웨일스와의 대결에서 아쉽게 1위를 차지하지 못했다.
국가대표팀은 세계 무대에서 이렇다할 성적을 내지 못했지만 유명한 축구인은 스코틀랜드에서 속속 나왔다. 대표적인 인물은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다. 퍼거슨은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의 고반 출신이다. 스코틀랜드 리그에서 줄곧 활약했던 퍼거슨은 1986년 맨체스터유나이티드 감독으로 부임, 맨유를 20차례 리그 챔피언으로 이끌어 축구 역사상 가장 뛰어난 감독으로 등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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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아일랜드도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와 마찬가지로 20세기 초반에 이미 축구의 인프라를 갖추고 있었다.
19세기 후반부에 아일랜드 이주민들은 남미에 축구를 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정도다.
그런데 아일랜드 축구는 잉글랜드와의 전쟁으로 주춤했다. 1919년부터 1921년에 있었던 전쟁으로 축구계도 흔들렸던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북아일랜드는 영국령으로 남게 되었고 아일랜드는 독립을 했다. 따라서 아일랜드 축구협도 별도로 만들게 됐다. 하지만 축구는 늘 럭비와 게일릭 풋볼에 밀렸다. 축구는 제1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런 이유로 아일랜드는 늘 월드컵 본선에 나서지 못했다. 매번 예선 탈락을 했고 1990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아일랜드는 그러나 스코틀랜드와는 달랐다. 월드컵 8회 도전에 불운을 맛보았던 스코틀랜드와는 다르게 아일랜드는 본선만 출전하면 조별 예선을 통과, 8강과 16강에 진출했다. 지금까지 3차례 월드컵에 진출한 아일랜드는 모두 8강과 16강에 나섰다.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배한 것은 약 35년인데 아일랜드는 그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 잉글랜드의 지배를 받았다. 무려 800년 동안 지배를 받았던 것. 잉글랜드 사람들은 아일랜드 사람들을 ‘하얀 흑인’이라고 멸시하며 무시했다. 이는 흑인도 아일랜드인도 무시하는 ‘이중 무시’다.
아일랜드는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했고 결국에는 독립을 쟁취했다. 1922년 12월6일 자유국이 된 아일랜드는 그러나 영국 왕에게 충성맹세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내전이 벌어져 북아일랜드로 갈라지게 되었다. 내전은 1937년에 끝났다.
이런 슬픈 역사 때문에 아일랜드는 잉글랜드를 앙숙으로 생각했다. 마치 한국이 일본을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잉글랜드가 월드컵에서 잘하면 아일랜드는 불편하다. 일본이 러시아 월드컵에서 선전하자 한국 팬들이 불편했던 것과 비슷하다.
유로 2016에 잉글랜드가 아이슬랜드에 패했을 당시 아일랜드 팬들은 고소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는 약간 달랐다. 해리 케인 잉글랜드 스트라이커가 아일랜드 혈통이라서 그런지 잉글랜드를 응원하는 분위기가 연출됐다. 의외의 분위기였다.
2022년 월드컵 예선에서 아일랜드는 A조에 편성되어 포르투갈, 세르비아, 룩셈부르크, 아제르바이잔과 대결했는데 아제르바이잔과 비기고 룩셈부르크에게 패했고 부진한 성적으로 일찌감치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아일랜드 출신의 축구 선수 중 가장 유명한 선수는 로이 킨이다. 킨은 맨유의 스타로 활동했는데 실력은 출중하지만 성격이 좋지 않아 기행을 많이 보인 선수로도 유명하다.
Photo by Shutterstock. 2018년 러시아 월드컵 기념 우표에 소개된 조지 베스트.
북아일랜드
아일랜드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했던 당시 영국 왕에 대한 충성맹세를 하기로 하고 영국령으로 남게된 나라가 북아일랜드다. 북아일랜드는 아일랜드보다 먼저 월드컵 무대에 선을 보였다.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서 5골을 넣으며 맹활약한 피터 맥팔랜드 덕분에 8강 진출을 이뤘다.
북아일랜드 역대 최고의 스타는 조지 베스트다. 1968년 발롱도르 상을 수상한 바 있는 베스트는 그러나 북아일랜드에는 이렇다할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가 활동했던 당시에 북아일랜드는 월드컵 본선에 출전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가 은퇴한 후인 1982년 스페인 월드컵과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
2005년 타계한 베스트의 장례식이 열렸던 다음날 북아일랜드에서 열리는 모든 축구 경기가 취소된 바 있을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그의 장례식에는 50만명이 넘는 추모객이 몰렸다.
스페인 월드컵에서 8강에 진출했던 북아일랜드는 프랑스에 1-4로 패해 4강 진출에는 실패했다.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이후에는 본선 진출을 이루지 못한 북아일랜드는 2018 러시아 월드컵 예선에서 플레이오프까지 진출하며 32년만의 월드컵 본선 진출 꿈에 부풀었으나 스위스에 1무1패로 밀려 아깝게 탈락했다.
북아일랜드의 축구도 잉글랜드와의 연결에서 자유할 수 없다. 늘 EPL의 영향권에 있으며 자국 선수 중 상당수가 EPL에서 뛰고 있다. 또한, 올림픽에서는 영국령에 있거나 있는 국가들이 UK라는 이름으로 함께 출전한다. 그런데 미묘한 게 있다.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인들 중에는 월드컵에서 잉글랜드를 응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다. 러시아 월드컵을 앞두고 스코틀랜드인 중 35%는 잉글랜드가 월드컵에서 전패했으면 한다고 응답했다.
AFP통신은 러시아 월드컵 관련 기사에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 팬들로서는 평생의 습관을 버리고 잉글랜드팀을 응원하는 것이 쉽진 않을 것"이라며 "이번 대표팀이 호감을 살 만한 팀이긴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이 바뀌는 건 또 다른 문제"라는 내용의 분석 기사를 쓰기도 했다.
잉글랜드·스코틀랜드·북아일랜드·웨일스 4개 왕국이 연합한 국가 그리고 독립한 아일랜드의 미묘한 관계는 축구에서 잘 드러난다. 특히 월드컵이 진행되면 이 5개 나라의 민심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어 흥미롭다.
Photo by Shutterstock. 영국 역사상 최고의 축구 선수 중 한 명인 보비 찰튼
잉글랜드
박지성이 뛰었고 지금은 손흥민이 뛰고 있는 잉글랜드의 프로축구리그(EPL)는 세계 최고의 수준을 자랑한다. 세계 최고의 축구 리그인만큼 이 리그와 잉글랜드 축구에 대해 관심이 높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잉글랜드에서 축구는 노동계급의 스포츠로 자리 잡았다. 1880년대에 영국에서는 꽤 조직적인 시합이 열렸고 경기에 참여하는 선수는 대부분 노동자였다. 당시 시합이 열리면 모든 산업이 일시에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할 정도로 참여율이 높았다.
노동자들이 축구에 빠져 일터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자 자본가들에겐 골칫거리였다. 이 같은 현상은 20세기 초반 남미와 유럽에서도 반복됐다. 축구의 인기도는 1901년 열린 FA컵의 관중동원 숫자를 보면 알 수 있다. 당시 무려 100,280명의 축구 팬이 경기를 보러 경기장으로 몰려들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잉글랜드에서의 축구 인기는 노동계급의 휴식 패턴도 바꿔놓아 공장주들은 노동자들이 주말(토, 일)에 쉴 수 있도록 해 주중에 축구 때문에 일을 거르는 일이 없도록 했다. 주말에 축구를 하는 것과 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영국의 문화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자본가들이 노동계층의 축구에 대한 열망에 두 손 두 발을 든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쯤되자 잉글랜드의 상류층도 축구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자본가들은 축구의 대중적 인기를 이용, 프로리그를 탄생시켰다. 지금과 같은 프로리그는 아니지만 이는 돈을 받고 축구를 하는 선수가 탄생하는 계기가 됐다. 1885년 쯤의 일이다. 그리고 잉글랜드에서는 1888년 풋볼리그가 창설되었고 여기에 12개 구단이 참가했다.
이때 축구리그의 기본 틀이 갖춰졌고 프로선수 보상과 규제 등이 제도화되기 시작했다. 1920년대까지 프로리그라는 것은 오직 잉글랜드에만 존재했다. 따라서 잉글랜드 프로리그는 향후 다른 나라의 프로리그가 벤치마킹을 해야 하는 그런 리그가 됐다. 잉글랜드 프로리그는 초반에는 선수들의 연봉을 제한하는 등 돈에 의해 운영되는 분위기를 막고자 했다. 온전히 스포츠맨십이 발휘되는 스포츠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어찌보면 사회주의 방식 비슷한 것이 잉글랜드 프로리그에 적용되었는데 스포츠 역사가인 빌 머리는 이에 대해 “이런 방식이 세계에서 가장 균형이 잘 잡히고 효율적인 운동경기 대회를 창조한 것도 사실”이라고 논평했다. 축구는 단순한 오락 이상이었다. 노동자들의 여가문화와 노동시간에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대영제국의 ‘문명화’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됐다.
그래서 식민지에서는 축구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다. 식민시대가 끝나는 시점에서 축구가 발전했다. 축구를 당장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도 영국인이 스쳐지나간 지역에는 대부분 축구 문화가 남게 됐다. 그렇기에 영국인들은 축구의 전도자로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러나 ‘축구 종주국’이라는 자존심은 이들이 국제축구사회에서 고립되도록 했다.
1930년대에 잉글랜드에서 축구의 인기는 급등했다. 인기가 높아지자 축구도박이 흥왕하기 시작했다. 축구 도박이 인기를 끌자 프로리그는 이를 막으려고 일정을 변경하는 등의 노력을 보이며 도박과 축구의 연을 어떻게든 끊으려고 애썼다. 당시만해도 축구와 돈을 연결시키는 것은 타락한 일도 여겨졌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허사였다. 축구 도박은 점점 국민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 축구 도박은 1950년대에 관련 산업 종사자수가 10만 명으로 증가해 잉글랜드 내에서 일곱 번째로 큰 산업으로 자리했다.
1966년은 잉글랜드 축구사에서 가장 중요한 해였다. 그동안 다른 나라에 만연했던 잉글랜드는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챔피언이 됐다. ‘축구 종가’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잉글랜드가 자존심을 회복하는 순간이었다. 참고로 1966년은 북한이 월드컵에서 8강에 진출하며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해였다. 당시 북한은 8강에서도 포르투갈에 3-0으로 앞섰는데 이후 5골을 허용하고 3-5으로 석패했다. 당시 잉글랜드에서 북한의 인기는 대단했다.
이전까지 보수적이면서 가부장적이었던 영국 축구는 1966년 우승을 계기로 개방적인 리그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프로 선수들은 노예계약을 맺는 등 불평등한 환경 속에서 일했는데 이후 개혁의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이미 다른 나라에서는 축구 스타들이 팝스타 대접을 받고 있었는데 영국은 달랐다. 일반 노동자보다 임금이 적은 선수들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월드컵 우승으로 잉글랜드 축구 내부에는 대혁신이 일었다. 그동안 일요일 경기는 금지되었던 관습이 있었는데 1967년부터 본격적으로 일요일 경기가 열렸고, 축구 도박은 더욱 성행했다. 그리고 선수들의 임금은 수직 상승했다.
월드컵보다 자국 리그를 중시하는 경향도 조금씩 바뀌었기는 했지만 자국리그를 중시하는 경향은 21세기에도 여전히 남아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는 ‘축구 종가’로서 자존심의 표현일지 모른다. 1966년 월드컵은 영국 축구의 혁신을 이끌었지만 한편으로는 훌리거니즘이 만방에 열려진 계기가 됐다.
훌리건은 이미 오래전부터 등장했지만 영국은 이를 애써 무시했는데 1966년 월드컵 당시 문제점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영국은 1970년부터 축구장에 담장을 세웠다.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했던 것이다. 훌리건 문화는 영국 축구 전반에 확산했다. 머리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팬들은 처음에는 골을 축하하러 경기장에 갔으나 나중에는 상대방을 약 올리러 갔으며 때로는 자기 팀이 지고 있을 때 경기를 중단시킬 목적으로 가기도 했다.”
축구가 점점 훌리건 문화와 융합하는데 영국 언론도 한 몫을 했다. 영국 언론은 축구를 다룰 때 점점 황색언론으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전통주의, 훌리건 문화, 자존심 등이 합해 영국의 축구에는 인종차별주의가 팽배해졌다. 1970년대에 그런 현상은 극에 달했다.
이에 반대 운동이 일어났는데 지식인을 자처하는 젊은 축구 팬들이 축구의 인종차별주의, 성차별주의, 부패, 훌리거니즘 등을 몰아내려는 운동을 펼쳤다. 이들은 황색언론에 대한 대응으로 스스로 잡지를 만들어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으며 이는 1980년대 이후 잉글랜드에 새로운 축구 문화가 자리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런 운동의 영향으로 1985년에는 축구 서포터 협회가 발족해 거친 팬들을 교육하고 즐기는 팬을 만드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정화 작업의 노력은 1985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렸던 경기에서 리버풀 팬이 39명의 사망으로 이끌려진 폭동의 주범이 되면서 본격화되었다. 당시 잉글랜드 클럽팀들은 1990년까지 모든 유럽 대륙에서 열린 대항전에 출전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 계기가 됐다. 1990년대에 영국 정부는 축구와 관련된 모든 범죄의 소탕에 매진했다.
정부의 노력으로 훌리거니즘은 많이 사라지긴 했지만 그 명맥은 계속 이어졌다.
축구계의 개혁의 바람을 타고 영국에는 새로운 축구 경기장이 속속 건설됐다. 새 경기장 또는 리모델된 축구장으로인해 티켓값이 오르기 시작했고 이후 축구 문화에 큰 변화가 생겼다. 많은 축구 팬들이 경기장이 아닌 맥줏집에서 축구를 보는 문화가 팽배했다.
축구 개혁은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EPL)가 세계적인 리그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새 경기장, 높은 TV중계권료가 스타들을 EPL로 이끌었고 이 리그는 세계 최고의 리그가 됐다.
이런 현상은 부정적인 영향도 있었다. 부자구단과 가난한 구단의 구분이 명확해지고 리그의 불균형이 심각해지면서 파산하는 구단이 생겨났고 세계 최고의 리그라는 자존심에 구멍이 나기 시작했다. 세계 최고의 리그를 운영하는 잉글랜드는 2018년, 2022년 월드컵 주최 후보국으로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EPL은 그럼에도 건재하다. EPL 경기는 전 세계 212개국에서 중계되며 6억4300만 가구가 이 리그의 경기를 시청하며 그 총수는 47억 명에 이른다.
잉글랜드 축구는 글로벌화 되었음에도 대표적인 선 굵은 플레이를 지향함이 변하지 않았다. 킥 앤 러시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직역하면 차고 달리는 플레이다. 킥 앤 러시의 빠른 공수전환이 잉글랜드 축구의 특징이다.
스포츠 둥지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러한 축구가 잉글랜드에 자리잡을 수 있었던 배경은 잉글랜드인들이 단순한 것을 좋아하는 것도 있지만, 기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잉글랜드는 날씨가 매우 안 좋기로 유명하다. 1년 내내 기온이 낮고 흐리며, 안개가 자주 끼고 수시로 소나기가 내린다. 그래서 잉글랜드인들은 가끔씩 해가 날 때마다 일광욕을 즐긴다. 이러한 날씨를 견디기 위해서 선수들은 강인한 육체를 만들어야 했고, 비로 인해 질퍽거리는 땅과 안개로 인해 시야 확보가 잘 안되는 곳에선 짧은 패스보단 긴 패스가 유리하기 때문에 이러한 플레이 스타일이 자리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잉글랜드인들은 변화를 싫어하고 강인함과 우직함을 자랑스러워 하고 있다. 킥 앤 러시는 잉글랜드인들의 이러한 성향과도 잘 어울린다.”
잉글랜드 역대 최고의 선수는 보비 찰튼이다. 그는 영국 대표로서 49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로서 249골을 기록했고 잉글랜드가 월드컵에서 최초로 우승을 차지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선수다.
역대 2위 선수는 보비 무어, 스탠리 매튜스, 고든 뱅크스 중 한 명인데 발표하는 기관에 따라 순위가 달라진다.
2018년에는 웨인 루니가 53골을 기록하며 보비 찰튼을 넘어섰다. 현역으로는 해리 케인(토트넘)이 32골로 최다골을 기록 중이다.
잉글랜드 축구 대표팀의 주장인 케인은 카타르 월드컵에서 모든 차별에 반대하는 ‘원 러브’ 완장을 찬다. '원 러브' 캠페인은 네덜란드가 2020 UEFA 유럽축구선수권대회(유로 2020)에 앞서 차별에 반대하고 다양성과 포용을 촉진하기 위해 시작한 것으로 케인은 “각 팀의 주장으들은 경기장에서 서로 경쟁하겠지만, 모든 종류의 차별에 대해서는 함께 맞설 것이다”라고 말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