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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와 인生死(11)] 축생축사의 아르헨티나, 마라도나&메시의 나라 [Soccer]

3번의 월드컵 우승, 세계 톱5 선수 두 명 배출한 '은'의 나라

등록일 2023년12월06일 21시05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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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rated by Midjourney. 마라도나와 메시의 3D 코믹스트립 캐릭터.

 

[들어가는 말(매회 반복)]

 

축구는 단순히 공을 차는 게임일 뿐일까요? 이 질문은 종종 축구에 대한 전 세계적인 열정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제기됩니다. 저는 2002년 한일 월드컵 동안, "나는 축구 경기를 단 한 게임도 보지 않았다. 공을 여기저기 차며 네트 안에 넣는 것에 전 세계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한 미국의 지인을 기억합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친구도 "공을 골대 안에 넣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어서 사람들이 저렇게 난리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이러한 견해들은 축구를 단순한 공놀이로 보는 일부 사람들의 관점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전 세계 수백만 팬들에게 축구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그것은 인생의 드라마를 구현하고, 팀워크, 전략, 인내, 그리고 끊임없는 경쟁 정신을 반영합니다.

 

축구는 인생과 마찬가지로, 성공을 위해서는 팀워크, 전략, 때로는 조금의 행운이 필요합니다. 이 게임은 협력, 열심히 일하는 것, 승리와 패배를 다루는 귀중한 교훈을 가르칩니다. 또한, 많은 문화에서 축구는 언어, 국적, 사회적 지위를 초월하는 통합의 힘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함께 불러 모으고, 공동체 의식과 소속감을 만들어냅니다.

 

축구의 매력을 이해하는 것은 단순히 골을 넣는 행위를 넘어섭니다. 게임이 주는 건전한 흥분, 예측할 수 없는 결과의 긴장감, 그리고 전 세계 팬들의 공유된 경험에 관한 것입니다. 선수들과 팬들의 열정과 헌신은 축구를 단순한 게임을 넘어서, 인간 경험의 고저를 포괄하는 세계적 현상으로 만듭니다.

 

 

(11) 아르헨티나 축생축사 

 

알렉산더 왓슨 허튼. 퍼블릭 도메인.

 

1882년 2월 알렉산더 왓슨 허튼이라는 교사가 스코틀랜드에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이민한 후에 ‘은’의 나라에 축구가 소개됐다. 아르헨티나는 라틴어로 ‘은’이라는 의미다. 이후 왓슨 허턴이 중심이 돼 아르헨티나에 축구 리그가 탄생했고 그가 세운 세인트앤드루스 학교가 1891년 우승을 차지했다.

‘아르헨티나 축구의 아버지’ 왓슨 허튼은 1853년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의 고발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에든버러의 다니엘 스튜어트 학교(현재 스튜어트 멜빌 칼리지)에서 교육받고 에든버러 대학교를 졸업한 후, 1882년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갔다. 그는 열정적인 스포츠맨이었으며, 교육에서 스포츠의 중요성을 믿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1880년 이후 초기 산업화가 일어났는데 이에 따라 해외 자본, 특히 영국과 프랑스의 자본이 유입되어 최초로 근대적 공장이 세워지는 등 아르헨티나는 빠른 경제성장을 이뤘다. 바로 이때 왓슨 허튼이 이민을 가게 됐던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1900년 이후부터는 그렇게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문화와 사회가 크게 발전하여, 본격적으로 '남미의 프랑스'라고 불리게 되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은의 여왕', '남미의 파리' 등 화려한 명칭을 갖게 되었다. 

왓슨 허튼은 1884년 2월 4일에 부에노스아이레스 영어 고등학교를 설립했으며, 여기에서 계속해서 학생들에게 축구를 가르쳤다. 1891년 세인트 앤드류 스코티시 학교의 알렉스 라몬트가 아르헨티나 최초의 축구 리그인 '아르헨티나 협회 축구 리그'를 설립했고, 이 리그는 영국 제도 외의 첫 축구 리그가 됐다. 당시에는 5개 팀이 참가했지만, 오직 한 시즌만 치러졌다.

1891년 알렉 라몬트 세인트 앤드류 학교 교장이 아르헨티나 최초의 리그인 '아르헨티나 협회 축구 리그'를 창설했고, 세인트 앤드류의 스코틀랜드 팀이 이를 우승했다. 이 5개 팀 리그는 한 시즌만 지속되었지만, 아르헨티나 협회에서는 이를 국가 최초의 축구 리그로 공식 인정하고 있다.

1893년 2월 21일 왓슨 허튼은 킬메스, 올드 케일도니안, 세인트 앤드류, BA 영어 고등학교, 로마스 및 플로레스 클럽의 대표들과 함께 '아르헨티나 협회 축구 리그'를 다시 설립하고, 1892년의 휴지기 이후 토너먼트 조직을 재개했다. 1898년 그의 학교에서 결성된 축구팀은 당시 아르헨티나 축구에서 가장 장식된 팀이 되었으며, 해체되기 전까지 총 22개의 타이틀(국내 15개, 국제 7개)을 획득했다.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이탈리아 등에서 이주한 이주민들이 축구에 더욱 집중하면서 아르헨티나는 축구의 나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아르헨티나의 이웃 나라인 우루과이도 같은 방식으로 축구가 발전하자 이미 1901년에 국가대항전을 벌이는 등 활발히 축구 문화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1910년에는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칠레가 3개국 국가대항전을 열어 국제대회의 모습을 갖췄다. 이는 이후 남아메리카축구연맹이 창설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이 무렵 영국의 유명 구단들이 아르헨티나를 비롯해 남아메리카 축구 방문을 하면서 축구 열기는 더욱 뜨거워졌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축구는 아르헨티나에서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노동 계층이 축구를 장악하면서 대중 스포츠로서 자리를 굳혔다.

대부분의 라틴 아메리카 국가가 그렇듯이 축구는 아르헨티나 정치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1930년대에 아르헨티나의 노동 계층이 축구를 장악했는데 중상류층이 이에 위기의식을 느꼈다. 당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주간지인 ‘엘 그라피코(El Grafico)’는 상류계층이 축구에 대한 통제력을 잃게 되자 럭비와 크리켓으로 관심을 옮기고 있었다고 썼다.

하지만 계급과 부의 소유에 관계없이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대체로 축구에 몰입했다. 축구의 인기가 높아지자 아르헨티나는 남미 국가 중 처음으로 축구를 프로화시켰다.

사진 - 셔터스톡

 

1930년대 아르헨티나에서 축구는 가우초(gaucho: 대초원 지대를 무대로 한 유목민), 아사도(asado: 구운 소고기 요리)와 함께 아르헨티나 국가를 상징하는 문화의 주요 일부가 됐다.

아르헨티나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문화가 된 축구는 이후 정치적으로 이용되기 시작했다. 1940년대 이후 아르헨티나 정권은 축구를 앞세워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이뤄내려고 했다. 축구는 페론주의 정권(1946-55)에서 주요한 대중문화가 됐고 이후 축구에서의 성패는 국민의 환희와 좌절에 영향을 미쳤다.

1970년대에 군사정권은 자신들의 치부를 가리고 국민의 관심을 정치 밖으로 돌리기 위해 월드컵 유치에 나서는 등 축구를 국민과의 갈등 해소 도구로 활용했다. 스포츠 경영학자인 스테판 지만스키는 1970년대 군사정권 당시 아르헨티나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축구에 대한 열정이 극에 달한 아르헨티나에서 독재자들은 축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1975년 FIFA는 1978년 월드컵 개최지를 아르헨티나로 결정했는데 그 다음해 아르헨티나에 군사정권이 들어서는 상황이 벌어졌다. 권력을 잡은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은 라디오와 TV의 모든 프로를 중단시키고 군사 행진곡을 반복 방송했다. 방송이 허용된 유일한 프로는 폴란드와 아르헨티나 간의 축구 경기였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파산지경이었지만 국가 예산의 약 10%를 월드컵 대회 준비에 사용했다.”

군사정권이 국민에게 만족을 주지 못함을 잘 알았기에 축구에 대한 만족감으로 대신하는 분위기를 연출했던 것으로 보인다. 과거 한국에서 전두환 쿠데타 정권이 국민의 관심을 정치 밖으로 돌리는 도구로 스포츠를 사용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군사정부는 페루 군사정권에 3만5,000톤의 곡물과 5천만 달러를 무상으로 지원했는데 이는 페루와의 경기에서 4-0으로 승리해야 다음 라운드에 진출할 수 있었기 때문에 했던 일종의 뇌물이었다.

당시 막강 전력을 자랑했던 페루는 주전 4명을 빼고 0-6으로 패했다. 남미에서 축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이 대륙의 독재자들이 잘 쓰는 수법이었는데 아르헨티나에서는 이미 1966년부터 1970년까지 군사 독재자인 온가니아(Ongania)가 축구를 적절하게 정치적으로 이용한 바 있다. 그러한 일이 아르헨티나 현대 역사에서 반복했다.

정부가 축구를 적절하게 이용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아르헨티나 국내리그가 세계적인 리그로 성장하는 데까지 이어놓지는 못했다. 아르헨티나는 독재자들로 인해 대체로 국내 정세가 불안했고 축구 리그가 안정되게 운영되는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았다.

전 세계적으로 축구 강국으로서 대접받은 나라이면서도 아르헨티나 국내 리그는 그야말로 혼란 그 자체였다. 꽤 오래전부터 아르헨티나 스타 선수들은 유럽에서 뛰기를 원했다. 유럽은 그들에게 돈을 벌 수 있는 곳이었다.

아르헨티나 국내 리그의 상황이 어느 정도 심각했냐 하면 1980년대 국제 클럽 대회에 2군팀을 내보내고 대신 출전료를 많이 받을 수 있는 유럽 순회 경기에는 1군을 보내 구단 운영비를 벌 수 있었다.

따라서 아르헨티나 축구 팬들의 클럽에 대한 충성심은 크게 낮은 편이었다. 세계 최강의 축구 국가에서 국내 리그가 형편없이 운영되는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는 21세기 들어서도 크게 나아지고 있지 않은 형편이다.

아르헨티나의 축구팬들. 사진 - 셔터스톡

 

아르헨티나 국내 리그가 성장하지 못한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바라스 브라바스 (Barras Bravas)’의 존재다. 일명 아르헨티나 판 ‘훌리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의 영향력은 유럽의 훌리건 그 이상이다. 이들은 한 클럽 운영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영향력이 막강하며 조직의 폭력성까지 있어 사회적인 이슈로 등장할 때가 자주 있었다.

축구 클럽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팬들의 투표로 선출되는데 여기서 극성스러운 바라스 브라바스의 영향력은 거의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클럽 운영자는 차후에 정치에 입문하는 경우가 많기에 이들은 정치적으로도 악영향을 끼치는 단체로 자라났다. 금품 살포는 기본이고 폭행과 살인으로 20년 형을 선고받은 바라스 브라바스 멤버도 있었다.

바라스 브라바스는 아르헨티나 국내 리그의 성장을 막을 뿐만 아니라 국내 정치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며 결국 사회를 어지럽히는 존재들이 됐다. 그러면서도 이들을 사회에서 축출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정치인이나 경영자가 아닌 열렬한 축구 팬들이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는 국내 축구 리그가 성장할 수 있는 토대는 분명히 있었지만, 상류층의 외면과 군사정권의 등장 그리고 국내 경제의 불안 등으로 제대로 뻗어나가지 못했다고 분석할 수 있다. 아르헨티나의 축구 시장은 21세기 들어 엄청난 규모로 성장했지만, 여전히 유럽의 빅리그와 견주면 왜소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아르헨티나는 계속 세계적인 스타 플레이어를 배출해내고 국가대표가 국제무대에서 계속 정상의 기량을 보이는 것은 역시 ‘민초’의 축구에 대한 사랑이 항상 정점에 있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 축구 스타들은 대부분(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 배경이 초라하다.

이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폐허지나 슬럼가에서 성장하면서 축구 선수로서 큰돈을 벌고 유명해지겠다는 일종의 헝그리 정신이 강하다. 축구 자체를 즐기는 분위기도 물론 있지만 성공에 대한 꿈이 그들이 축구를 더 잘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국내 리그는 빈약하기에 그지 없지만 일단 아르헨티나 축구 리그에서 축구를 잘한다는 평가를 받으면 부와 명예가 보장된 유렵 축구 리그로 갈 수 있기에 어린 축구 선수들은 ‘안심하고’ 자신의 삶을 축구에 던진다.

아르헨티나가 낳은 영웅 디에고 마라도나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가난한 집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10세 때부터 축구를 시작해 훗날 펠레와 함께 20세기 최고의 축구 선수로 성장한 바 있다. 아르헨티나는 마라도나와 같은 선수를 유럽에 잃고 싶지 않았지만 국내 리그의 여건상 그가 이탈리아로 떠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르헨티나 축구 팬들은 1930년대에도 이탈리아에 대거 선수를 빼앗기고 그들이 국적을 변경해 이탈리아 대표로 뛰는 것을 보면서 분노했다. 그래서 아르헨티나에 프로리그가 생겼다.

하지만 시간이 많이 지난 21세기에도 아르헨티나 축구 스타들의 꿈은 결코 국내 리그에서 뛰는 게 아니다. 어떻게 해서든 성공해서 유럽의 빅리그 구단과 계약을 하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소망이다. 그러한 그들의 희망은 거의 종교적이기까지 하다.

아르헨티나가 단순히 스타 파워 때문에 축구를 종교적으로 좋아하는 것만은 아니다. 아르헨티나에서 축구는 삶의 중요한 방식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축구로 인해 행복해하고 축구로 인해 일치단결이 된다.

아르헨티나에서 계층 간의 화합이 일어나는 유일한 문화가 축구이다. 축구에 대해서는 빈부의 격차도, 사회적 지위도, 명예도, 학력도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르헨티나 축구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1978년 월드컵 우승 당시의 장면.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 기념 우표로 발행됐다.

 

아르헨티나인들은 축구를 통한 화합을 지난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경험했다. ‘축구 투쟁의 역사’라는 책을 쓴 사이몬 쿠퍼(Simon Kuper)는 당시 상황을 증언한 한 아르헨티나 국군 장교의 말을 다음과 같이 받아 적었다.

“모든 시민이 길거리로 나와 기뻐했다. 진보주의자들은 페론주의자들와 껴안았고 가톨릭신자는 개신교 신자, 유대교 신자와 부둥켜안았다. 우리는 아르헨티나 국기를 들고 한 마음이 됐다.”

 

한국인이라면 2002년 월드컵 당시의 상황과 1978년 월드컵 당시의 상황과 비슷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986년, 2022년에도 월드컵 우승팀이 된 아르헨티나의 축구 팬과 대화를 나눌 때 축구 전문가 수준이 되어야 한다. 그들은 대부분 축구 선수이거나 축구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 국내 리그가 성장하지 않았다고 해서 한국을 연상하면 안 된다. 그래도 축구가 대표적인 문화 현상인 나라이기에 아르헨티나 국내 리그는 세계적인 수준은 아니더라도 활발하게 움직여지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에만 무려 24개 프로 구단이 있다는 사실은 놀랍다. 그래서 도시를 대표하는 개념보다는 동네를 대표하는 개념이 더 강하다. 팬들은 자신이 사는 지역의 구단을 응원하는 것보다 자신이 태어나서 자란 곳을 근거지로 한 구단을 응원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24개 프로구단이 있지만 대표적인 구단은 라 보카(보카 주니어스), 리베르 플라테, 인디펜디엔테, 산 로렌소 등이다. 라 보카(보카 주니어스)와 리베르 플라테의 경기는 아르헨티나 전 국민이 관심을 갖는 라이벌전이다.

최고의 라이벌전이 도를 넘어서 살인 사건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지난 1994년 4월 보카주니어스의 팬들이 두 명의 리베르 플라테 팬들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런데 섬뜩한 사실은 클럽들은 폭력적인 서포터들에게 대가를 지불했다는 것이다. 상대팀의 선수나 관계자에게 폭력을 사용하고 위협과 협박을 하는 서포터에게 수고비가 지불됐다.

아르헨티나는 그야말로 ‘축생축사’(축구에 살고 축구에 죽는)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아르헨티나는 2022년까지 총 18차례 월드컵에 진출해 우승 3회, 준우승 2회, 87경기에 나와 47승 16무 24패, 149득점, 98실점을 기록했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 남미 예선에서 아르헨티나는 콜롬비아, 칠레, 우루과이 등 강호를 눌렀지만 페루, 베네수엘라, 파라과이 등에는 단 1승도 거두지 못하는 희한한 결과를 남겼다. 아르헨티나는 18경기에서 7승7무4패를 기록해 브라질, 우루과이에 이어 3위에 올라 본선 진출을 이뤘다. ‘은의 나라’는 불안한 예선전 결과가 본선에도 이어져 세계 최고의 스타 메시를 보유하고도 16강 진출에 그쳤다. 아르헨티나는 16강에서 대회 우승팀 프랑스에 패해 비교적 일찍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 남미 예선에서 아르헨티나는 11승6무로 브라질(14승3무)에 이어 가볍게 본선 진출 티켓을 받았다. 이 예선에서 아르헨티나의 젊은(78년생) 감독 리오넬 스칼로니는 메시를 꼭 필요한 공격 상황에서만 활약하도록 하는 파격적인 운영을 했다. 이전에는 메시가 공격의 모든 상황에 관여했지만 예선 때부터 그럴 필요가 없었다. 

메시의 아르헨티나는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역사상 세 번째 월드컵을 품에 안았다. 아르헨티나는 2022년 12월19일 오전 0시(한국시간) 카타르 루사일에 위치한 루사일 아이코닉 스타디움에서 열린 월드컵 결승전에서 프랑스와 3-3 동점을 이룬 후 승부차기에서 4-2로 승리해 통산 세 번째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다. 

대회 최우수선수상에 해당하는 골든 볼은 메시가 수상했다.

 

아르헨티나는 첫 80분 동안 경기를 지배했다. 전반 22분께 페널티킥을 얻은 메시가 선제골을 기록해 1-0으로 앞서나간 아르헨티나는 전반 36분에는 디마리아가 추가골을 올려 2골차로 리드를 벌렸다. 쉽게 우승하는 듯했다.

프랑스는 전반 내내 힘없는 경기로 일관했고 후반 34분까지도 무기력한 경기를 이어갔다. 60년 만에 처음으로 월드컵 2회 연속 우승은 물거품이 되는 듯했다. 

그런데 경기의 흐름이 바뀌는 상황이 후반 34분에 벌어졌다. 프랑스가 페널티킥을 얻었던 것. 젊은 영웅 음바페가 이를 골로 연결시켜 경기는 2-1이 됐다. 이번 대회 개인 6번째 골. 후반 37분에는 음바페가 추가골을 올리며 경기는 2-2 원점이 됐다. 음바페는 7골로 득점왕 레이스에서 선두로 올라섰다. 프랑스는 이후 경기를 지배하며 여러 차례 역전 기회가 있었는데 추가골로 연결하지는 못했다.

아르헨티나는 추가 시간인 후반 52분쯤 메시가 결정적인 중거리포를 날려 승부를 마무리 지을 뻔했지만, 프랑스 골키퍼의 선방으로 경기를 연장으로 넘겨야 했다. 

연장전은 그야말로 정신력의 싸움이었다. 짧은 기간 무려 7경기나 싸워야 했던 두 팀은 상당히 지친 상태에서 연장전을 맞이했다.

아르헨티나는 연장 전반 종료 직전 라우타로 마르티네스가 결정적인 득점 찬스를 두 차례나 맞았지만, 슈팅이 모두 골문을 빗겨나갔다.

연장 후반 3분쯤 아르헨티나가 균형을 깼다. 메시가 골문 앞에서 툭 찬 공이 골라인을 넘어갔고 음바페가 골문 안에서 공을 걷어냈지만 이미 선상을 넘어선 후였다. 3-2 아르헨티나가 리드했다. 아르헨티나가 여기서 경기를 마무리하는 듯했다. 

경기는 그러나 역대급으로 흘러갔다. 연장 후반 11분 46초쯤에 프랑스는 페널티킥을 얻어냈고 이를 음바페가 골로 연결해 3-3 균형을 이뤘다. 역사상 가장 긴박감이 넘치는 결승전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음바페는 해트트릭으로 이번 대회 8골을 기록해 득점왕에 올랐다.

프랑스는 연장 후반 종료 직전 상대 골키퍼와 1대1 상황을 맞이해 경기를 마무리하는 상황이 됐지만, 아르헨티나 골키퍼의 선방으로 3-3으로 승부차기로 돌입했다. 이것이 골로 연결됐더라면 승부차기 없이 프랑스가 4-3으로 승리하는 상황이었다.

승부차기가 이어졌다. 

첫 번째 승부차기는 프랑스 음바페의 몫이었다. 공이 골키퍼의 손에 닿기는 했지만, 골라인을 넘어서 1-0으로 프랑스의 리드. 아르헨티나 첫 번째 키커는 메시였다. 메시 역시 성공. 프랑스 두 번째 키커가 실패했고 아르헨티나는 성공을 해 스코어는 2-1 아르헨티나 리드. 프랑스의 세 번째 킥도 실패. 아르헨티나는 세 번째 킥 성공. 3-1로 아르헨티나가 앞섰다. 프랑스 네 번째 킥 성공으로 3-2가 됐지만, 아르헨티나 네 번째 키커인 몬티엘이 골을 만들어내 아르헨티나가 4-2로 피 말린 승부에 마침표를 찍었다.

 

아르헨티나 역대 최고의 스타는 앞서 소개한 디에고 마라도나이고 현존하는 스타는 2022 월드컵 최고의 스타 리오넬 메시다. 그는 FIFA 발롱도르를 2009, 2010, 2011, 2012, 2015, 2019, 2021, 2023년에 받았다. 그는 2014, 2022 월드컵에서는 ‘골든볼(MVP)’을 수상했다.

마라도나와 메시는 역대 최고의 축구 선수 톱5 안에 드는데 아르헨티나는 이처럼 역대급 선수 2명을 보유한 축구의 나라다. 두 선수 중 어떤 선수가 더 위대할까. 챗GPT(chatGPT)에게 메시와 마라도나를 비교해달라고 했더니 다음과 같이 답을 했다.

“리오넬 메시와 디에고 마라도나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두 명으로 널리 알려진 아르헨티나 프로 축구 선수이다. 두 선수 모두 놀라운 드리블 능력과 불가능해 보이는 각도에서 골을 넣는 능력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두 선수 사이에는 몇 가지 주요 차이점도 있다. 메시는 공을 갖고 있을 때 스피드와 민첩성이 뛰어난 공격수라면 마라도나는 시야가 넓고 패스 능력이 뛰어난 미드필더였다.

업적을 보면 메시는 마라도나보다 더 많은 개인상을 받았고 찬사도 더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메시는 발롱도르(세계 최고의 선수에게 주어지는 상)를 8번이나 수상했다. 전 소속팀인 FC바르셀로나에서 그는 수많은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반면 마라도나는 발롱도르를 단 한 번밖에 수상하지 못했고, 그의 가장 큰 업적은 1986년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를 우승으로 이끈 것이다.

전반적으로 어떤 선수가 더 낫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포지션도 다르고 플레이 스타일도 다르기 때문이다. 메시와 마라도나는 모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축구 선수로 여겨지며 그들의 유산은 오늘날까지 계속 기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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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와 인生死(58)] 소련의 암흑기에서 여전히 못 벗어난 라트비아 [Soccer]
[축구와 인生死(57)] 태국과 비슷한 수준의 에스토니아 [Soccer]
[축구와 인生死(56)] 마라도나가 손을 댔지만 여전히 답보 상태의 벨라루스 [Soccer]
[축구와 인生死(55)] 이전 같지 않은 축구 인기, 말레이시아, 김판곤이 가능성은 보여줘 [Soccer]
[축구와 인生死(54)] 놀라운 축구 사랑 성적으로 이어지지 않는 태국 [Soccer]
[축구와 인生死(53)] 신태용이 세우는 인도네시아의 축구
[축구와 인生死(52)] 축구가 크리켓을 넘어설 수 없는 나라 인도 [Soccer]
[축구와 인生死(51)] 중국은 왜 축구를 못하는 것일까? [Soccer]
[축구와 인生死(50)] '쌀딩크'의 나라 베트남 축구의 성장 [Soccer]
[축구와 인生死(49)] 로제 밀러의 나라 카메룬 [Soccer]
[축구와 인生死(48)] 축구광 카뮈의 나라, 알제리 [Soccer]
[축구와 인生死(47)] 전쟁을 잠시 멈추게 한 스타 드록바의 코트디부아르 [Soccer]
[축구와 인生死(46)] 축구가 일종의 종교같은 가나 [Soccer]
[축구와 인生死(45)] 폐쇄적인 나라, 리그는 가장 개방적, 사우디아라비아 [Soccer]
[축구와 인生死(44)] 70년대 황금기, 80-90년대 암흑기의 폴란드, 그 이유는? [Soccer]
[축구와 인生死(43)] 마약 카르텔로 1986년 월드컵 포기한 콜롬비아 [Soccer]
[축구와 인生死(42)] 에우제비우, 피구, 호날두의 나라 포르투갈 [Soccer]
[축구와 인生死(41)] Again 1966의 주인공 북한 축구, 아시아 최초 월드컵 8강 [Soccer]
[축구와 인生死(40)] 2026년부터 4년마다 월드컵 진출 보장된 뉴질랜드 [Soccer]
[축구와 인生死(39)] 축구가 인기 스포츠가 아닌 나라, 호주 [Soccer]
[축구와 인生死(38)] 관전보다 직접 플레이하는 걸 좋아하는 덴마크 사람들 [Soccer]
[축구와 인生死(36)] 축구할 때 밥하는 안 되는 축구사랑 나이지이라 [Soccer]
[축구와 인生死(35)] 프랑스에 영향을 받은 아프리카 축구의 강자, 세네갈 [Soccer]
[축구와 인生死(34)] 월드컵이 처음으로 개최된 나라, 우루과이 [Soccer]
[축구와 인生死(33)] 이집트, 아프리카의 뜨는 별 [Soccer]
[축구와 인生死(32)] 아프리카의 강호 튀니지, 프랑스를 꺾을 정도 [Soccer]
[축구와 인生死(31)] 벨기에가 축구를 잘하는 이유 3가지 [Soccer]
[축구와 인生死(30)] 야구 무관심, 오직 축구에만 관심 있는 나라 코스타리카 [Soccer]
[축구와 인生死(29)] 옛 유고연방 나라들: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보스니아, 세르비아-몬테네그로 [Soccer]
[축구와 인生死(28)] 진정한 다문화 축구의 나라 스위스 [Soccer]
[축구와 인生死(27)] 유소년 축구, 지도자 육성에 투자해 급성장한 아이슬란드 [Soccer]
[축구와 인生死(26)]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 경기 안 보면 축구팬 아닐 정도, 스페인 축구 [Soccer]
[축구와 인生死(25)] 호모 루덴스가 보이는 일본 축구, 점점 강해지는 중 [Soccer]
[축협-Log] 축협사태와 의료사태의 닮은 점: 리더십
[축구와 인生死(24)] 비쇼베츠의 나라 러시아, 당분간 월드컵 불출전 [Soccer]
[축구와 인生死(23)] 16강은 꼭 가지만 8강은 힘든 축구의 나라 멕시코 [Soccer]
[축구와 인生死(22)] 즐라탄 이후 암흑기 맞고 있는 스웨덴 [Soccer]
[축구와 인生死(21)] 손흥민을 키운 독일의 유스 아카데미, 실효성 이제 없나? [Soccer]
[축구와 인生死(19)] 우리에겐 히딩크의 나라: 네덜란드 [Soccer]
[축구와 인生死(18)] 리더가 멍들어 축구 전체가 멍들게 된 불가리아 [Soccer]
[축구와 인生死(17)] 하지가 세계적인 루마니아로, 하지가 축구 후진국으로 [Soccer]
[축구와 인生死(16)] 잦은 깜짝 승리의 주인공 슬로바키아 [Soccer]
[축구와 인生死(15)] 사회전반의 부정부패에 영향을 받은 체코의 축구 [Soccer]
[축구와 인生死(14)] 1950년대 골든팀이 지금은 FIFA 20-30위권 [Soccer]
[Soccer| 칼럼] 홍명보 감독, 클린스만보다는 훨 낫겠지
[축구와 인生死(13)] 아시안컵 결승 진출, 역대 최고 성적낸 요르단 [Soccer]
[Soccer] 너무 기쁜데 너무 마음 아픈 경기, 대한민국 아시안컵 4강에
[Soccer] 손흥민 아빠 손웅정은 족집게 - "한국의 텅빈 축구!"
[축구와 인生死(12)] 이란의 문화와 역사가 보이는 축구 [Socc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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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와 인生死(10)] 초문화적 공화국 프랑스 [Soccer]
[Soccer] 메시&마라도나 (아르헨티나) 비교해줘
[축구와 인生死(9)] 독일 무너뜨린 일본의 즐기는 축구 [Socc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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