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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시사(時事)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별로 관심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접하더라도 수동적으로 반응했다. 기회가 되면 신문에서 보거나 들려오는 뉴스를 듣는 정도라고 할까. 읽고 듣더라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어떤 의구심이나 질문을 하지 않았고, 전문가의 의견을 듣듯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뉴스는 당연히 사실을 전달하는 거 아니냐는 생각한 것도 한몫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말이 꼭 나쁜 말만은 아니다.
필자가 그렇다. 시사에 관심을 두게 되면서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을 살펴봤다. 이왕이면 이동시간에 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때마침 적합한 프로그램을 찾았다. 아침 7시에 시작하는 프로그램이라 출근하면서 듣는다. 다 듣지는 못하고 30분까지만 들을 수 있는 여건이 돼서 그렇게 들었다. 다행인 건 그때까지만 들어도 많은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다. 하나하나 뜯어보고 두루두루 살피는 한마디 한마디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행자의 이름을 처음 들어봤다. 라디오를 들을수록 매력을 느꼈고 그래서 검색을 해봤다. 출간한 책도 여러 권 있었다. 그중에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가?>라는 책이 눈에 띄었다. 검색해 봤다. 시사 평론가로서 뉴스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관해 설명해 주는 책이었다. 책을 주문하기 위해 검색해 보니, 구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그래서 온라인 중고서점을 살폈고, 다행히 있는 것을 발견하고 바로 주문했다.
‘합리적 의심’
뉴스를 가려 읽는 것을 강조하면서 기준으로 든 표현이다. 전혀 별개의 사실 두 개가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맺어져 있진 않은지 살피는 것이고, 별거 아닌 사실 하나가 부풀려져 거창한 주장을 떠받치는데 남용되지는 않는지 살피는 것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합리적 의심’은 상식에서 출발한다. 상식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고, 아귀가 맞지 않는다고 판단될 때 ‘합리적 의심’이 시작된다. 다른 건 필요 없다. ‘합리적 의심’이 들면 논리적으로 사고하면 된다. 앞뒤가 맞지 않고 아귀가 맞지 않는 지점, 즉 관계가 맺어지는 지점을 논리의 틀로 살피는 것이다.”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어려운 게 아니다. 상식적으로 살펴볼 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면 하나하나 따져보고 살펴보면 된다. 그렇게 물음표가 느낌표가 될 때까지 묻고 또 물으면서 살피고 알아보면 되는 거다. 당장 먹고사는 게 급하다고 미루고 미뤘던 것을 하면 된다는 말이다. 갑자기 무언가를 살피고 알아보진 않더라도 관심을 가지고, 무조건 수용이 아닌 합리적 의심으로 들여다봐야한다.
사람의 생각도 마찬가지다. 내가 하는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 살피는 기준도, ‘합리적 의심’으로 살펴봐야 한다.
보통은, 자기 생각은 다 옳다고 믿는다. 나름 논리적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인에게 강조하고 심하면 강요한다. 논의의 여지 없이 힘으로 누르고 밀어붙일 때도 있다. 그렇게 이루어진 결과가 과연 좋을까? 장담할 순 없지만, 좋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자기 생각이 옳다고 믿는 이유는 뭘까? 정당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종합해 봤을 때 지금 이 선택이 최선이거나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정당성을 부여한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정당성을 부여하고 싶은 생각이 올라오면, 당위성을 떠올려야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아닌, 그래야 하는 이유를 떠올려야 한다는 말이다. 내 처지에서만 괜찮은 게 아니라, 누가 봐도 괜찮다고 인정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합리적 의심을 하는 과정이다. 합리적 의심으로 도출한 결과는, 당위성을 갖출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렇게 당위성의 삶을 추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