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럽다!”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볼 때, 반사적으로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이다. 그것이 유형이든 무형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내가 도달하고 싶은 곳에 이미 도착해있는 사람을 볼 때도 그렇다. 자신은 아직 한참 남은 것 같은데, 이미 도착해서 여유 있게 있는 모습을 보면 부럽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나이까지 적으면 부러움을 넘어 시샘이 나기도 한다. ‘나는 왜 저 나이에 저렇게 하지 못했을까?’라며 자신을 탓하기도 한다. 하지만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그래서는 안 된다. 왜냐고?
나는 대가를 치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정 없는 결과는 없다. 하지만 부러워하는 이면에, 과정은 생각하지 않는다. 내 눈에 보이고 내 귀에 들리는 결과만 떠올린다. 그러니 마냥 부러울 수밖에 없다. 올림픽이나 국제 대회에서 금메달 혹은 좋은 성과를 낸 선수를 보고, 해설자가 울먹이거나 아예 대놓고 우는 모습을 볼 때가 있다. 거의 가 선수 출신 해설자다. 그 사람이 우는 근본 이유를 들어보면, 메달이나 성적 때문이 아니다. 지금의 자리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훈련을 이겨내고 고통을 인내하면서 왔을까, 하는 생각에 눈물을 흘리는 거다. 자신이 겪어봤으니 그 무게를 느끼는 거다.
장사가 잘 되는 집을 보면 마냥 부러워한다.
“나도 저 장사나 해볼까?” 농담이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던지는 사람이 있다. 이런 말을 들을 때, 나는 전혀 부럽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안쓰럽다는 생각이 든다. 가끔 배달을 시키면 시간이 오래 걸릴 때가 있다. 그러면 직접 찾으러 간다. 배달을 위주로 하는 매장은, 크기가 작고 홀에 테이블도 몇 개 없다. 주방 바로 앞에 카운터가 있고, 그 안에 사람들이 있다.
그 공간은 매우 비좁다.
혼자 서 있기도 빠듯한데, 두 명 혹은 세 명이 있다. 배달 주문 알람이 요란하게 울린다. 카톡에서 사진을 묶어서 올리지 않고 개별로 올리면 울리는 카톡 소리처럼, 쉴 새 없이 울린다. 알람에 맞춰 나오는 전표를 보고 주문을 넣고, 나온 음식을 포장한다. 짧은 시간이지만, 전쟁통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신이 없다. 내가 보는 잠깐의 시간도 갑갑하고 정신없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분들은 거의 하루 내내 그렇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휴’ 한숨이 절로 나왔다. 너무 힘겹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왕이 되려는 자. 왕관의 무게를 견뎌낼지어다!”
게임 광고였는지 어디였는지 정확하진 않지만, 이런 문장이 있었다. 아마 음성으로 들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왕이 되려고 하면, 왕관의 무게를 견딜 각오를 하라는 말이다. 이것이 무언가 바라고 원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마음의 태도라고 생각된다. 이루고 싶은 것이 있거나 도달하고 싶은 지점이 있다면, 그 과정에서 겪어야 할 무게도 함께 짊어지겠다는 각오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운이 좋아 도달할 수는 있겠지만, 유지하기는 어렵다. 버틸 체력이 없기 때문이다.
바라고 청하고 있는 것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을 취하고 얻는데 필요한 과정을 겪을 각오를 하고, 실제 겪어야 한다. 그 과정을 지나면서 버틸 힘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어려움을 겪을 때는 힘들고 괴롭고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 과정으로 자신이 만들어진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오히려 이런 과정이 없을 때 불안해해야 한다. 내가 성장할 시간이 없는 거니까 말이다.
값을 치르지 않으면, 약도 독이 된다.
그런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쉽게 얻은 돈으로 한순간에 몰락한 사람 이야기가 그렇다. 불은 매우 유용한 도구다. 하지만 불을 다루지 못하는 상태에서 얻게 된 불은, 재앙이 될 수 있다. 내가 원하고 청하는 것이 있다면 먼저 그것을 이루는 데 필요한 과정을 견디고 이겨낼 각오를 먼저 해야 한다. 그래야 내가 무엇을 원하고 청하는지 정확히 알 수 있다. 그것만이 내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