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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 의심’
언제부턴가 자주 들리는 표현이다. 이전부터 이 표현이 많이 사용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인지하고 그 이유에 대해 고개를 끄덕이게 된 게 얼마 안 돼서, 그렇게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언론에서 하는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사실이라는 생각이었기 때문에, 언론에서 하는 말을 당연히 믿었다. 하지만 시사 프로그램을 듣고 저널리스트에 관련된 책을 읽고 공부를 하면서 다 그렇지 않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언론이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라 믿게끔 유도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합리적 의심이 필요하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합리적 의심은 상식을 기준으로 살펴보는 작업이다. ‘1+1=2’라는 공식처럼, 앞에서부터 살펴봐도 그리고 뒤에서부터 살펴봐도 이해가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어떤 상황을 보면, 앞에서부터 살펴볼 때는 이해가 가는데 뒤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가면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날달걀로 프라이를 만드는 건 이해가 가지만, 프라이를 날달걀로 만드는 건 이해하기 어려운 것과 같다. 상식이라는 기준에 맞지 않는다. 하지만 가끔, 개그도 아닌데, 가능하다고 그리고 맞는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다. 상식이 기준이 아니라, 자기 생각이 기준인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다.
새로운 무언가를 접할 때, 합리적 의심이 필요하다.
상식의 기준에 따라, 옳은지 그른지 혹은 필요한 것인지 필요하지 않은 것인지를 살펴야 한다. 그렇게 판단하고 선택해야, 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 아무리 좋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해도 혹은 가슴 떨리는 느낌을 받았다고 해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아무런 결과도 낼 수 없다. 운으로 되면 모를까. 여기서 잠깐! 합리적 의심을 해서 이해가 되면, 바로 행동으로 옮겨질까? 어? 잠시 머뭇거리게 된다. 이해된다고 다 행동했으면 지금보다는 뭐가 달라도 달라졌을 테니 말이다. 당연, 좋은 방향으로. 이것도 합리적 의심인가?
‘적극적인 의심’이 필요하다. 합리적 의심에서 머무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의심해야 한다는 말이다.
‘의심’이라는 단어가 부정적으로 인식돼서, 안 좋은 의미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눈꼬리를 가늘게 하고 뭐든 부정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지금까지, 적극적인 의심을 하지 않아서 놓친 기회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머리로 알고 있는 것을 가슴으로 끌어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행동으로까지 연결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적극적인 의심은, 그런 역할을 한다.
머리에 머문 생각이 바로 행동으로 연결되는 건 쉽지 않다. 그 중간에 연결고리가 바로 가슴인데, 머리에서 가슴으로 끌고 오는 것이 바로, 적극적인 의심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정말 맞는지 살펴보는 것이고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꾸는 과정이다. 그렇게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고 가슴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뛴다면,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게 더 어렵게 된다. 우리는 작든 크든 이런 경험을 하나쯤은 소유하고 있다. 평소에는 일찍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일찍 일어나는 경험을 한 것도 포함해서 말이다.
“가슴 뛰는 일을 하라!”
많이 들어본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을 이렇게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슴이 뛰는 일은 하게 된다!” 또 하나! 가슴은 그냥 가만히 있는데 뛰지 않는다. 가만히 서 있는데 심장박동이 뛰지 않는 것과 같다. 빠르게 걷거나 뛰어야 조금씩 뛰기 시작하고 한계에 다다르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한다. 어떤 일도 마찬가지다. 가슴을 뛰게 하려면 움직여야 한다. 자세히 살펴보는 게 그것이다. 이리 보고 저리 보면서 세세하게 살펴야 한다. 그래서 확신이 들면 가슴은 뛰게 되고, 그 가슴은 행동하게 만든다. 이 모든 과정을 한마디로 정리한 것이 바로, ‘적극적인 의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