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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전 세계를 들썩게했던 드라마가 있었다.
'오징어 게임'이다. 무엇이든 처음이 어렵다고 했던가? <오징어 게임>으로 시작된 열풍은, 뒤이은 드라마까지 영향을 미쳤다. 당연히 드라마들이 그럴만한 작품이기도 하지만, 선두에서 일으킨 열풍의 덕을 보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고 본다. 이는 길 없는 산길을 올라가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처음에 올라가는 사람이 잔가지를 잘 치면서 길을 만들어주면 뒤이은 사람들이 수월하게 올라가는 것처럼 말이다.
'오징어 게임' 후반부에 징검다리 게임이 나온다.
매우 높은 곳에 징검다리처럼 지점들이 있다. 유리로 되어있는데, 어떤 유리는 강화유리라 안전하게 착지할 수 있고, 다음 칸으로 넘어갈 준비를 할 수 있다. 어떤 유리는 일반 유리라 착지하는 순간 와장창 깨지고, 바닥으로 떨어져 즉사한다. 한 칸 한 칸 옮길 때마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그렇다고 마냥 신중할 수만은 없다. 제한된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되면 모든 유리는 깨지게 되고 그 위에 있는 모든 사람은 떨어져 죽게 된다. 앞에서 멈칫거리면 뒤에 있는 사람들이 빨리 가라며 재촉한다.
순서에 따라 각각 유리하거나 불리한 점이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다.
건너가기 위해서는 무조건 발을 떼야 한다는 사실이다. 발을 떼지 않으면 한 칸도 옮길 수 없다. 어느 쪽으로 갈지 판단해서 과감하게 발을 떼고, 옮겨야 한다. 그래야 결과가 나온다. 어디라도 옮기면 죽거나 살거나 각각 50%의 확률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그대로 있으면 100%로 죽게 된다. 시간이 초과하기 때문이다.
석유를 실은 배에서 불이 난 일화가 떠오른다.
모든 선원이 갑판에 올라왔다. 바다 한가운데로 뛰어내릴지 말지를 결정해야 했다. 배에 그대로 있으면 죽을 확률 100%지만, 뛰어내리면 살아날 확률이 그래도 0.1%는 된다고 볼 수 있었다. 각자가 선택했고 자신의 선택에 따라 확률 100%대로 된 사람도 있고 0.1%의 희망으로 살아난 사람도 있다. 침몰하는 현재에 가만히 머물러 있으면 죽을 확률 100% 지만, 과감하게 발을 떼서 옮기면 최소 0.1%의 희망이라도 있다는 교훈이다.
이와 반대되는 속담도 있다.
‘구관이 명관이다.’라는 속담이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지만 결국 기존의 것이 더 좋다는 의미에서 사용된다. 현재 있는 곳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새로운 곳으로 옮기길 원한다. 그렇게 선택해서 발을 뗐는데, 기존에 있던 곳보다 더 좋지 않을 때가 있다. 앞서 말한 이야기를 반박하기 위해 사용하기 좋은 이야기다.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옳은 선택일까? 과감하게 발을 떼는 것이 옳은 선택일까? 있을 수 있다면 가만히 있는 것이 옳은 선택일까? 누구도 장담하진 못한다. 다만 전자의 경우는 내가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지만, 후자의 경우는 내가 선택한다고 해서 다 되는 건 아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공동체의 선택을 받아야 가능하다. 내가 선택을 고려하거나 확정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선택의 기준은 경쟁력에 둬야 한다.
공동체 안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발을 뗄지 머물러야 할지 결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개인이 공동체와 맞설 수 있는 건 하나뿐이다. 경쟁력이다. 경쟁력이 있다는 말은, 내가 그 공동체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말과 같다. 나는 지금 내가 머물러 있는 공동체에 꼭 필요한 사람인가? 그렇다면 머물러 있어도 좋다. 그렇다고 방심하면 안 되겠지만 말이다. 경쟁력이 없다면? 발을 떼는 용기를 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발을 떼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 나도 겪어봤지만, 참담하고 암울하다. 그리고 대안을 찾을 시간이 없다. 사실, 어떠한 선택도 정답은 없다. 다만, 이것만 명심하자.
“최악의 선택은 잘못된 선택이 아니다. 내가 한 선택을 부정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