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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삶이지만, 주인으로 사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는 표현 자리에는 원래, 주인과 반대 개념인 ‘종’이라는 표현이 들어가야 하는데, 그 표현은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들어 표현을 바꿨다. 사실, 세상 거의 모두가 일부는 ‘종’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 삶을 100% 온전히 주인으로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았다고 하자. 이 질문에, “그럼!”이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 역시 바로 그리고 확실하게 답하기 어렵다. 문득문득 그러지 못한 나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 선택인데, 누군가의 시선을 더 의식하게 된다. 미화하면 배려라고 에둘러 말할 수 있지만, 그건 내가 안다. 배려와 눈치의 차이를 말이다. 눈치를 보고 있으면서, 배려라고 말할 순 없는 노릇이다. 그 또한 주인이 아닌, 그렇지 않은 삶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삶은 지분싸움이다.
주인으로 사는 삶과 종으로 사는 삶 중에, 어느 지분을 더 많이 갖기 위해 노력하는가? 이 질문에 답을 하면서, 주인으로 사는 삶의 지분을 더 갖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보통 사람의 삶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안타까운 상황이 가끔 있다. 자신은, 삶의 주인으로서 선택했다고 하는데, 그렇게 보이지 않을 때가 그렇다.
공동체에 속해 있지만, 주변 사람과 상의 없이 독단적으로 선택을 하는 사람이 있다. 그 선택에 자신이 있었으니, 그런 결정을 내렸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선택할 때와는 다르게 그 사람의 표정과 행동은 움츠러든다. 앞서 말한, 배려와 눈치의 차이랄까? 눈치를 보고 있는데 배려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퇴사하는 직원이 그렇다. 평생직장의 시대라는 말 자체가 사라진 지 이미 오래라, 언제까지 한곳에 다닐 순 없다. 이런저런 여건과 조건을 따지면서 옮길 수도 있고, 업종 자체를 바꿀 수도 있다. 특히 젊다고 말하는 20~30대는 더욱 그럴 수 있다. 아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지근한 물에 빠진 개구리처럼, 뭉그적거리다가 선택에 여지가 없는 상황이 되면 너무 비참하기 때문이다. 그 상황을 상대방이 알면, 이도 저도 못하는 상태라는 것을 알면, 주인의 지분은 언감생심. 종으로 꼼짝 못 하고 살아야 한다.
잠시, 아주 잠시지만, 나는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다. 30대 중반에 겪었다. 심지어, 직접 내 앞에서 그런 말을 들었다. “네가 지금 어디 갈 데가 있어?” 그 사람 말대로 그때는, 정말 갈 데가 없었다. 아니 그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지금 돌아보면, 생각이 너무 없었던 거다. 너무 비참했던 그 상황을 아직 기억한다. 그래서일까? 언제 어느 때라도 살아남을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누구도 내 인생을 책임져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약해질 때마다 되뇐다.
퇴사하는 직원의 행동이, 전과 다를 때가 있다. 물론, 평소와 다름없이, 끝나는 날까지 한결같이 있다가 가는 직원도 있다. 마치 내일 다시 출근할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직원이 있다. 내가 잘못 보는 것일 수도 있지만, 분명 다르다. 평소와 느낌이 다르다. 오랜 시간 함께 있었는데도 낯설게 느껴진다. 어색하다. 마주치면 인사하던 직원이 쓱 피한다. 멀리서 가끔 보면 뭔가 불안한 듯 보이기도 한다. 왜 그럴까? 본인이 주인이 돼서 선택했는데 왜 그럴까?
단정 지을 순 없다. 본인의 사정을 깊게 들어본 것도 아니고, 여러 정황을 살펴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문이 들기는 하다. 평소와 다름없이 있다 떠나는 직원과 그렇지 못하는 직원과의 차이를 말이다.
앞서 말한, 주인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라 생각된다. 주인은 말 그대로, 자기 삶의 주인이다. 자기 삶의 주인은 당당하다. 자기 선택에 당당하다. 그러기 때문에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당당하지 못하다. 주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인의 눈치를 살피는 데 더 집중한다. 그렇게 계속 주인으로 착각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지금 나는, 어떤 지분을 더 소유하면 살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해볼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