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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법’
어떤 기준에 따라, 상반되는 둘로 나누는 방법을 말한다. 이 구분법은, 자칫 흑백논리로 빠질 가능성이 크다. 내가 주장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다른 하나는 그르다는 것을 밝혀야 하기 때문이다. 선거철이면, 항상 나타나는 모습이다. 나를 선택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설명하고 설득하면 될 것을, 반대편 사람이 이런저런 잘못이 있으니 내가 돼야 한다는 논리를 펼친다.
자신이 선택받아야 하는 이유를 강조하는 사람은 드물다.
상대방을 선택하면 안 되는 이유를 강조하는 사람이 대다수다. 선거는 누구를 선택할지 결정하는 것이지, 누구를 선택하지 않을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자신이 왜 돼야 하는지를 말하기보다, 타인이 왜 되면 안 되는지만 강조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이유로 자신을 선택해야 한다고 설명하는 사람을 과연 신뢰할 수 있을까? 설득력이 떨어진다. 암튼. 선거 얘기는 여기까지만 하겠다.
이분법은 삶에서 다양하게 적용된다.
가장 단편적인 구분은, 좋고 싫은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 혹은 사람이 있고, 내가 싫어하는 것 혹은 사람이 있다. 나뉘는 기준을 잘 살펴보면 내가 어떤 성향을 지녔는지 확인할 수 있다. 그냥 느낌이나 기분으로 나눴다고는 하지만, 거기에 숨겨져 있는 자기의 선택 기준이 있다. 자신의 정체성 혹은 성향을 모르겠다고 하면, 이렇게 구분을 지어 놓고 살펴봐도 좋겠다. 그 외에도 마음에서 올라오는 어떤 감정에 대해 그 의미를 잘 모르겠다면, 그 감정을 기준으로 둘로 나눠봐도 좋겠다. 그러면 그 감정의 의미에 대해 희미하게나마 알 수 있지 않을까?
사람을 가까이하는데도 이분법이 적용된다.
‘나에게 필요한 사람’과 ‘내가 필요한 사람’ 전자는, 내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나 마음으로 안정감을 얻기 위해, 내가 곁에 두고 싶은 사람을 말한다. 후자는, 주체가 내가 아닌 타인이다. 누군가가 나의 도움이 필요할 때, 내가 곁에 있어 줘야 하는 사람을 말한다. 개인의 성향에 따라 어디에 더 중요한 가치를 두는지는 다 다르다. 상황에 따라 어디에 무게를 둘지 결정할 수도 있다. 내가 힘들거나 도움이 필요하면 전자의 사람에 무게를 두게 되고, 누군가 도움을 요청하면 후자의 사람에 무게를 둘 수 있다.
‘좋은 친구 먼저 되기’
필자가 쓴 책 <딸에겐 아빠가 필요한 순간이 있다> 후반부에 나오는 제목이다. 내용은 이렇다.
건널목에서 좋은 친구를 만나야 한다고 아이에게 닦달하는 엄마를 봤다.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말을 듣지 않았나? 그래서 좋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 봤다. 추상적인 좋은 사람 말고 현실적으로 좋은 사람 말이다. 나한테 도움이 되면 좋은 사람이고 나한테 해를 끼치면 나쁜 사람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도 들었다. 좋은 사람 만나기를 바라는 것도 좋지만, 내가 좋은 사람이 되면 어떨까?
나에게 필요한 사람을 만나는 건 중요하다.
하지만 나에게 필요한 사람만 쫓아다니는 건 좀 아쉬운 마음이 든다. 내가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 나의 장점을 찾아서 살리고 다듬는 노력을 하면 어떨까? 분명 내가 필요한 사람이 있을 테니 말이다. 어떤 작가가 책을 출간하고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내가 읽고 싶어서, 이 책을 썼다.”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이 있는 데 없더란다. 그래서 자신이 썼다고 한다. 내가 읽고 싶은 책은 곧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이 찾는 책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좋은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따라서 대단한 사람이 되기 위해 불철주야 뼈를 깎는 노력을 하자는 말은 더욱 아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내가 나눌 수 있는 것을 찾고, 그것을 조금 더 다듬는 정도의 노력은 할 수 있지 않냐고 말하는 거다. 그 과정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것은, 몰입의 즐거움과 행복한 마음이다. 내가 좋아하고 잘 할 수 있기에 몰입이 잘 된다. 그리고 그 시간은 매우 행복한 시간으로 채워진다. 타인을 위하는 마음이 곧 자신을 위하는 마음으로 갚아진다는 말이다. 해볼 만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