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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토크’
<딸에겐 아빠가 필요한 순간이 있다> 출간 후 처음 진행했던 ‘북 토크’가 생각난다. 100일 동안 매일 글 쓰는 프로젝트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그때 함께 했던 분들의 모임에서였다. 일명 ‘백백 동기’라고 일컫는 분들이다. 오전 7시부터 시작된 모임은, 9시 30분이 넘어서 끝이 났다. 내 경험으로는 가장 오랜 시간 함께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주말 아침을 이렇게 하기 쉽지 않은데 말이다. 다시 한번 감사한 마음이 올라온다.
파워포인트(PPT) 자료를 띄우고 준비한 이야기를 하나둘씩 풀어나갔다.
그리고 책을 읽은 소감을 나눴다. 너무 정성스럽게 그리고 좋은 마음으로 읽어주신 것을 나누는데, 마음이 너무 따뜻했다. 이분들이 정말 대단한 이유는 따로 있다. 이 모임에서는 출간했다 하면, 책을 바로 구매하시거나 구해서 읽어주신다는 사실이다. 말로만 하는 응원이 아닌, 실천하는 응원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그래서 ‘매직의 방’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 책 출간 후 첫 강연이라, 강연 슬라이드를 만들었다.
강연이나 발표할 때 슬라이드를 만드는 데, 내가 만드는 방법은 이렇다. 머릿속으로 전체 흐름을 그린다. 어느 정도 스토리가 구성되면, 머릿속으로 그렸던 내용을 A4 용지를 펴서 하나씩 적는다. 슬라이드를 구성하는 것처럼, 네모 칸을 만들고 어떤 내용을 구성할지 대략 쓰거나 그린다. 그렇게 네모 칸의 숫자를 늘려나가는데, 네모 칸의 숫자가 곧 슬라이드의 페이지가 된다. 그리고 PPT를 열고 하나씩 내용을 채워나간다.
나는 기본적으로 PPT에 글자가 많은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 이미지와 꼭 필요한 키워드 정도만 슬라이드에 담는다. 어찌 보면 슬라이드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만드는 게 아닌 거다. 내가 설명하는 이야기의 흐름을 잃지 않도록, 길잡이 역할을 하는 용도가 더 맞는다고 볼 수 있다. 슬라이드의 이미지나 키워드에 따라 내가 준비한 이야기를 풀기 때문이다. 그렇게 준비한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갔다. 워낙 좋은 기운을 주시는 분들이라 그런지, 부담 없이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이야기를 준비할 때, 추억 영상 하나가 떠올랐다.
이번 슬라이드에도 넣었는데, 눈물이 없다고 생각했던 나에게 폭포수 같은 눈물을 뿜게 만든 영상이다. 그때는 설명할 수 없었다. 왜, 가끔 그런 거 있지 않나? 이렇다저렇다 뭐라 뭐라 명확하게 이야기할 수 없는 상황 말이다. 가슴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북받쳐 올라오는데 왜 그런지 모를 때도 있고, 내 입에서 어떤 말이 나왔는데 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나도 모를 때가 있다. 눈물이 나는데 왜 나오는지 모르겠다며 당황해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멋쩍어서 그런 건가?’하고 지나갔는데, 내가 그 경험을 한 거다.
시간이 지나고 차분하게 돌이켜 보고 나서야, 그 이유를 찾았다.
그 배우의 대사 하나하나가 공감된 거다. 공감된 이유는 내가 꽁꽁 감추고 있던 속마음을 들켰기 때문이다. 내가 부정하고 싶었던 부분이기도 했다. 나는 어쩔 수 없었다고 정당화하면서 했던 말과 행동들이다. 들키고 싶지 않은 속마음을 들켜서 일지도 모른다. 다른 누군가도 나와 같은 마음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위로를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드라마 속 인물이긴 하지만 말이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 하면, 부작용이 생긴다.
억지를 부리게 되고 마음에 없는 말이나 거짓을 말하게 된다. 잘못 색칠한 곳을 지우기 위해 계속 덧칠을 하는 것처럼, 가능한 방법을 다 동원해서 덧칠하게 된다. 문제는, 그 색이 맞는지 틀리는지는 중요하지 않게 생각한다. 보이고 싶지 않은 부분을 가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밀려오는 공허함은 나 자신을 주저앉게 하기도 한다. ‘이게 아닌데….’ 하면서 말이다.
설명할 수 없는 건 그대로 둘 필요가 있다.
있는 그대로 받아 안거나, 있는 그대로 흘려보내면 된다. 억지로 받아안을 필요도 억지로 흘려보낼 필요도 없다. 다 이유가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온전히 받아들이면, 약속한 것처럼 필요한 때에 그 이유를 알게 된다. 갑자기 떠오를 때도 있고 누군가를 통해 깨달을 때도 있다. 우리는 그것을 은총이라 부른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설명하려 들지 않을 때, 우리는 은총을 입게 된다.